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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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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70~80년대 대입 수험생들이 얕잡아 보기 어려운 국어 시험 항목이 성어였다. 보통 네 글자로 이뤄진 사자성어(四字成語)의 뜻과 용례를 묻는 시험 문제가 자주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성어 이어가기 게임이 성행한 적도 있다. 유식하고 진지한 학생이야 이어갈 성어가 많았지만 궁색한 학생은 가끔 말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의 성어에 이어 다른 성어를 내놓아야 할 학생은 끙끙거리다가 기발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예를 들면 '마포종점' '3한강교(현재 한남대교)' 식이다. "마포종점이 무슨 성어냐"고 물으면 과거 마포가 전차의 종착지라는 사실을 대면서 "술 취해 쓰러진 사람이 자주 가는 곳의 뜻"이라고 천연덕스레 풀어 우스개를 만들기도 했다. '3한강교'에 대해서는 "교통체증 심한 곳"이라는 뜻풀이를 내놓았으니 성어의 유머 버전 정도로 치부해 줄 만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내놓았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조건은 성숙했으나 뭔가 이뤄지지 않아 답답한 상황'을 일컫는 말이란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성어식의 간결한 상징일 수 있어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불 기운은 위로 오르고 물 기운은 아래로 처져 반목과 분열의 한국 상황을 지적한 지난해 '상화하택(上火下澤)'에 이어 의미를 곱씹어 볼 만하다.

정치권도 성어 바람을 탔다. 열린우리당은 '무심운집(無心雲集)', 한나라당은 '쾌도난마(快刀亂)'를 선정했다. 그 이유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비워 구름이 모일 수 있는 1년을 만든다" "내년을 국운 융성의 계기로 만들겠다"는 각각의 변을 달았다. 열린우리당의 것은 성어라기보다 조어(造語)에 가까워 세련된 맛이 떨어진다. 성어라는 게 과거에 이미 쓰여 자리 잡은 말이라는 뜻임을 간과했다. 한나라당의 것은 지난 시절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대권욕심을 섣부르게 내비쳤다는 점에서 속되다.

국정홍보처장은 '박극복래(剝極復來)'란 주역 용어를 내놓았다. '군자가 소인배에 둘러싸여 외롭지만 진실이 밝혀져 군자가 다시 빛을 발한다'는 뜻이란다. 군자가 누구인지? 대통령과 집권당을 말하는 것이라면 현 상황에서 볼 때 나가도 너무 나갔다. 정책 실패와 혼선에 대한 자성은커녕 단단한 아집과 끝없는 결기만 느껴진다. 성어의 세계는 깊고 넓음을 지향한다. 성찰과 자신에 대한 경계가 뒤따라야 성어를 쓰는 맛이 난다. 그러지 않으면 성어는 '마포종점'식 우스개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