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석환특파원 현지취재/흔들리는 소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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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장 시민군 의사당 경비/탈소 몸부림 리투아니아/란츠베르기스 대통령 본지 단독회견/무슨일 있어도 독립 꼭 성취/한국의 30억불 대소 원조 못마땅
지난달 22일 찾아간 리투아니아공화국 의회건물은 의회라기 보다는 흡사 전쟁상태에 돌입한 혁명정부의 지휘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부설계가 몹시 복잡한 건물 3층에 리투아니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대통령)인 란츠베르기스의 집무실이 있었고 최고회의 회의장은 1층에 있었다.
건물 안팎 곳곳엔 총을 거머쥔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민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소련군 징집대상자들」이지만 시민군쪽으로 자원한 청년들이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리투아니아 의회는 마침 개각을 단행하기 위해 정부측이 제안한 입각 대상자들에 대해 심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89년 사유디스(독립재건운동) 동맹이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집권세력이 된후 줄곧 지속돼온 고민이지만 독립추진 속도와 전략을 둘러싼 심각한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자신의 물가인상정책이 거부된데 항의해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프룬스키에네 전 총리도 사실은 란츠베르기스 최고회의 의장과의 정치적인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분석이었다.
의회에서 공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욜란타 코노볼로베이테양(22)은 『란츠베르기스와 프룬스키에네가 화해를 해야할텐데 정책상의 이견이 깊어지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집권세력 내부에 독립을 위한 전술을 놓고 이견이 존재하는 가운데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란츠베르기스는 소련에 대해 비타협적인 투쟁노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지난 1월13일 탈소 독립시위때 소련군이 15명의 사망자를 낸 사태후 주민들은 란츠베르기스의 이러한 비타협적인 투쟁노선을 더욱 확고하게 지지하게 됐다.
올해 나이 58세. 본래는 빌니우스 음대를 나와 음악사 교수를 역임했고 피아노연주도 수준급인 예술가 출신이지만 어린시절 나치치하를 경험했고 반체제활동을 계속한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란츠베르기스. 그의 독립전략은 무엇인가.
지난달 22일 밤 11시20분 기자는 란츠베르기스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30분간에 걸쳐 그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옷깃에 리투아니아공화국 국기를 단 풍채당당한 란츠베르기스는 기자를 맞는 순간부터 『리투아니아는 독립국가』며 『17일의 국민투표는 우리들의 것이 아닌 그들(연방)의 것』이라고 봇물터뜨리듯 자신의 견해를 토로했다.
전날(21일)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는 공노명 한국대사와 미국 솔라즈 의원의 방문 등 잇따른 외국사절단의 방문에 무척 고무돼 있는듯 란츠베르기스는 『소련군대는 1940년 이래로 항상 리투아니아에 주둔해 왔으며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단 한번도 인정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란츠베르기스는 화제를 한국으로 돌려 『전세계가 1월13일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을 규탄하던 때 소련 대표단을 서울로 불러 30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 결정을 내린 것은 무엇이 진정으로 소련을 돕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했다.
즉 『리투아니아의 인권문제와 소련의 정치문제를 연계시키지 못한 미숙한 결정』이며 『소련군에 의해 83년에 격추된 KAL기 사건의 진상과 소련내의 조사과정과 책임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요구하지 못한 것은 실수』라는 것이었다.
인터뷰 도중 기자가 느낄 수 있었던 란츠베르기스의 독립에 대한 자신감과 상황인식은 이웃한 에스토니아의 정치지도자들의 견해와 유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인식과 자신감은 모스크바에서 만난 소연방내 보수파들의 견해와는 크게 대립되는 것으로 그만큼 연방과 공화국간의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다.<리투아니아공 빌니우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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