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무가지 줍는 노인들 그 고달픈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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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 지하철에 오른 박동만(68. 가명) 할아버지가 쉴새없이 무가지를 주워 담고 있다.

최복순(65. 가명) 할머니가 수거 나온 고물상 트럭쪽으로 무가지 자루를 끌고 가고 있다. 수백kg의 무가지가 담긴 자루를 끄는 작은 몸집의 할머니가 힘겨워 보인다.

"할아버지,그 무가지 가져가서 뭐하시게요."
출근길 지하철. 허름한 트레이닝복에 큼직한 자루를 들고 쫓기듯 객차를 오가는 노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버려진 무가지를 팔아 생계를 잇는 이들은 대개 70세 안팎 고령이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지하철에 노구를 싣는 사연도 갖가지다.

오전 7시, 노인들만의 '무가지 쟁탈전'이 시작됐다. 박동만(68.가명) 할아버지는 매일 할머니와 함께 2호선 지하철에 오른다. 양방향 전동차에 나눠타고 승객이 두고 내린 무가지를 정신없이 자루에 담는다. 할아버지는 뇌졸중을 앓았다. 몸놀림이 불편하다. 가끔 승객 머리에 신문을 떨어뜨리고 발을 밟기도 한다. 미안해 얼굴이 달아올라도 다른 노인에게 폐지를 뺏기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10시 30분이면 장사 끝. 만남의 장소인 충정로역에서 할머니와 모은 자루를 센다. 쉴새없이 객차를 오가 간신히 8자루. 고물상에서 kg에 70원을 준다. 둘이서 1만6000원을 벌었다. 그나마 무가지가 안 나오는 주말을 빼면 닷새 벌이다. 월수입은 채 40만원이 안 된다.

◇손자 크고 나니 생활비 '뚝'=박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둘이 산다. 장성한 아들이 셋이지만 살림을 보태주는 자식이 없다. "그래도 손주 키워줄 때는 괜찮았는데…." 맞벌이하는 큰 아들, 은행 다니는 작은 아들네 남매를 유치원 보내기 전까지 맡아줬다. 그 땐 생활비를 받았다. 손주들이 커 제 집으로 가면서 형편이 어려워졌다. 자식들이 주는 생활비가 끊겼다. 퇴직한 지 벌써 10여 년. 뇌졸중까지 앓아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아파트 경비 자리? 그것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야. 빽이 있어야 누가 넣어주지." 부양의무와 경제력이 있는 자녀가 있어 생활보호대상자 자격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라도 움직여 벌지만, 더 늙어 앞으로가 걱정이야."

◇"청소원 자리 없을까"=최복순(65.가명) 할머니는 마흔에 혼자가 됐다. 시집간 딸이 하나 있다. "젊어 혼자 돼서 제대로 가르치질 못했어. 그러니 저도 먹고살기가 힘이 들지." 뻔히 아는 딸네 형편을 생각하면 차마 손 벌릴 수가 없다. 식당일이며 우유 배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갖은 고생에 고혈압과 관절염을 얻었다. 얼마 전까진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은행을 주워 까서 술집에 팔았다. "술집도 장사가 안되는지 그만 가져오라더라고." 이웃 독거노인이 무가지 수거 일을 귀띔했다. 지하철을 타기 시작한지 2주째. "키가 작아서 선반에 팔이 안닿아. 끌어내리다 떨어뜨리는 게 그렇게 미안해." 건물 청소원 자리 하나 구하면 걱정이 없겠다고 했다.

◇목적지 없는 승객,무가지 노인=이젠 어디서도 일자리를 주지 않는 이들.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무가지 줍는 노인들은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다. 그래서 매일 쏟아지는 400만부의 무가지가 '효자'라는 의견도 있다. 흔치 않은 벌이를 제공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수백kg의 폐지를 모아 나르는 고강도 노동에 비해 품값은 턱없이 적다. 박 할아버지 부부는 둘이 4시간을 일해 1만6000원을 벌었다. 한 사람당 시급 2000원 꼴이다. 법정 최저임금 3100원(내년 3480원)보다 1000원 이상 적은 돈이다. 그나마 일감이 줄까, 지하철에서 쫓겨날까 걱정이 크다. 벌이를 찾아 지하철 타는 노인이 늘며 폐지 선점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젠 심심찮게 몸싸움도 벌어진다. '미관상' '혼잡해서' 싫다는 시민 민원에 아침이면 역사 직원들과 마주칠까 새가슴이 된다. 지하철 운영사들도 답이 없다. "딱하죠. 부모님 생각도 나고. 그런데 민원은 계속 들어오고 안전 문제도 생기고…."

"수익자부담 원칙을 고려하면 무가지 업체들이 뭔가 해법을 내놔야 마땅한데 강제할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난감한 거죠."도시철도공사 영업지원팀 관계자의 고민이다. 노인들을 고용할 수도 매몰차게 내보낼 수도 없다보니 "내일부턴 우리 역에서 폐지 옮기지 마세요" 하고 만다. 오전 11시. 4시간의 중노동을 마친 노인들이 고물상에서 품값을 챙겨 나선다. "점심은요?" "밥 사먹을 여유가 어디있어?" 꼬깃꼬깃 지폐를 구겨넣고, 노인들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늦은 아침의 그림자가 그 뒤를 따른다.

[박연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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