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다산 정약용의『목민심서』|만성부패 근절 "민생안정" 소망|임형택<성대교수·한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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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목민심서』는 일표이서로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1762∼1835)의 경세 적 저서가운데 가장 중시돼 온 노작이다. 거기에 자 서를 붙인 때가 1821년 봄이었으니 지금부터 정확히 1백70년 전에 완성된 것이다.
나는 이『목민심서』에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다. 10년 넘어 걸린 그 역주의 공동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초『「목민심서」를 함께 읽자』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내심 별로 탐탁해 하지 않았다.『목민심서』란 케케묵은 구시대에 지방행정을 담당한 수령의 필독서로 쓰여진 책인데 지금 그걸 읽어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런 회의를 떨치지 못하면서「동무 따라 강남 간다」는 기분으로 끼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매주 한번씩 하는 독회를 진행하다 보니 점점 거기에 빨려 들었다. 또 처음에는 단순한 독 회였는데 그냥 읽고 치우지 말고 원고로 만들어 출간하기에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일이 벌어진 터이지만 그 일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목민심서』는 옛날 책으로 48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인데다 난삽한 문장에 복잡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빠짐없이 번역하고 꼼꼼히 학술적인 주석을 달기란 미상불 지겹고 괴로운 노릇이었다. 게다가80년대 초 정치적 탄압의 와중에서 동인의 상당수가 옥고를 치르고 강단에서 축출되는 시련에 부닥치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역주모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래도『역주 목민심서』는 완 간되었다.
나는 지금『목민심서』에 붙잡혔던 세월을 회상하며 두 가지 사실을 들어 말하고 싶다. 하나는『목민심서』에 바친 시간이 합산하면 꽤 길 터이나 내 개인적으로는 아주 유익한 시간 보내기였다. 그리고 교수 15명이 10년을 들여 난감한 일을 능히 마무리지은 데는 무엇보다 『목민심서』자체에 무한한 견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에게 유익했고 여러 사람을 견인한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목민심서』에 담겨진 풍부한 역사·사회 내용이 우리의 학적 관심을 붙잡고 거기에 저류 하는 다산 선생의 정신이 나의 마음가짐을 일깨운 것이다.
이『목민심서』를 다산은 왜 지었는가. 혼신의 슬기와 열정을 쏟아 거 저로 남긴 그의 저작 의도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런 의문을 던지는데 에는 까닭이 있다.
『경세유표』는 국가제도 전반의 개혁을 고안한 대설계도다. 이에 반해『목민심서』는 『현행 체제를 그대로 두고 백성을 보호해 보겠다(인금지법이목오민야)』는 차원이다. 변혁의지나 진보 덧 전망은 뒤로 물려진 셈이다.
다산은 강진고을의 외진 바닷가에서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즈음 어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이 몸이 살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는지 여부는 나 개인의 애환일 뿐이요, 지금 이 만민이 구렁텅이로 빠지는 판에 장차 어찌할 것이오』라고 했다.
그리고『정부란 생 민의 심간이며 생 민이란 정부의 사체입니다』고 국가와 인민의 관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한다. 따라서 만민이 온통 굶어 죽는 위기는 곧바로 국가적 위기가 된다. 그는 지극히 낮고 천한 처지에서 고 통하는 민의 삶을 인간적 신뢰에다 연민의 정서를 담아 시작으로 형상화하는 한편국가와 인민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가해 인민의 창조적 삶이 보장 될 수 있는 정치제도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쓰여진 논문이 저 유명한「탕론」과「원목」이다.
「탕논」「원목」에서 다산은 민의 주체성을 긍정해 민의 자율적 삼정과 의사의 반영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원리에 합당한 것으로 구상했다. 그러나 이 고도의 선취 적 이론은 원론적인 주장에 그치고 세부설계 및 실행계획을 수립하진 못했다.
그도 그럴밖에 다산은 그의 시대에서 민주 체 정치제도가 설 현실기반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산 앞에는 민 일반의 생존이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구민이 긴급을 요하는 과제였다. 만성적 부패와 구조적 부정이 날로 달로 가속화 해 가던 추세였다.
현실주의자 다산의 고뇌가 여기에 있었다. 이에 만민의 질 고를 대증 요법 식으로 치유하려는 의도에서『목민심서』를 저작한 것이다.
한편『지금 곧 개혁하지 않으면 필시 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제도 개혁의 문제 역시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일에 속했다.『경세유표』를『목민심서』와 자매편으로 지은 뜻이 여기에 있다.
『경세유표』에서 설계한 바 국가기구는「원목」「탕론」의 정치 사상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 대폭 수정한, 다시 말하면 근원적 개혁의 이상을 현실에 절충한 것이다.『목민심서』는 그나마 개혁의주의 주장을 일체 거두어들이고 있다. 오직 현행 제도의 합리적·효율적 운영으로 부정 부패를 단속해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려는 소망을 철두철미 관철한 것이다.
『목민심서』가 현행체제를 수긍하고 들어갔다 해서 다산이 본질적 문제를 결코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문 면의 곳곳에서 지금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밖에 도리가 없다는 따위의 언급과 함께 한숨 소리가 새 나오며, 기본사상이 바닥으로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종합검진을 하듯 민이 처한 현실, 정치, 사회·경제적 환경과 그 역사적 배경, 봉건국가 통치의 하부 발달에 이르기까지 구조적 모순의 양상을 치밀하고 예리하게, 그리고 총체성의 시각을 잃지 않고 고찰·분석해 내고 있다. 거기에 조선왕조 후기 사회의 실상이 거울처럼 드러나 그 시대를 폭넓게 통찰할 수 있고, 나아가 오늘 우리의 착잡한 현실을 비추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목민심서』는 그 저자가 의도한 효험을 당시 과연 얻을 수 있었던가. 비록 제한적이지만 더러는 읽혀진 모양이니, 어떤 관리는 고을살이를 나갈 때 휴대한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의 자기확산에 견주면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였다. 그리하여 만연한 부정부패의 극치에서 조선왕조는 체제 자체가 파멸에 이르렀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주체적 역사 진로가 차단된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목민심서』는 현실주의자 다산의 위대한 면모를 약여하게 발휘한 역사적 고전이다. 이 고전은 진보적 전망이 아득한 상황에서 구 처 없이 분노와 탄식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스스로 한계를 엄숙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목민심서』로부터 l백70년이 지난 오늘에도 다시「목민심서 적 처방」은 절실히 요청되는 것 같다. 우리 사회에『목민심서』의 죄인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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