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선정 2006 새뚝이 <1>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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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 주로 의존해 왔던 논술 교육과 대입 진로 지도에 현직 교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한 해였다. 사진은 전국의 고교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현직 교사 19명이 지난달 23일 중앙일보에서 학교 논술수업을 정상화하는 방안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이다. 김태성 기자

새뚝이는 어려운 현실과 야합하지 않고 본래의 직분과 원칙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새뚝이는 바람 부는 대로 끌려가는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입니다. 본지가 2006년 사회 분야 새뚝이로 선정한 이들은 이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사교육 광풍 속에서도 공교육에 아직 희망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고교 교사, 한국의 과학수사 능력을 우습게 알던 프랑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 노조의 횡포에 맞서 끝까지 소신을 지켜낸 대학 총장, 내 자식은 내 손으로 지키겠다며 폭력시위 현장에 달려나간 전.의경 부모, 기업활동을 돕기 위해 하천의 물길을 돌린 시청 공무원이 그들입니다.

학원 뺨친 논술 … 진학 자료 … 공교육 자존심 살렸다
권희정 교사 - 이남렬 교감

올해는 '공교육(학교)을 살리자'며 발벗고 나선 교사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학원에만 맡길 수는 없지 않으냐"는 자각과 공감대가 넓게 퍼져나가면서 교사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논술 교사들'이다. 학원이 아닌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논술을 훌륭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서울 상명대부속여고 권희정(34.철학.사진(左)) 교사는 그 선두주자다. 권 교사는 10년 전 처음 부임 때부터 독서 토론식 수업을 시작했다.

이론을 설명하고 암기시키는 틀에 박힌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책이 어려워 못 읽겠다는 아이에게는 책 읽는 법을, 토론에서 침묵을 지키는 아이에게는 말하고 듣는 법을 가르쳤다. 권 교사는 "학원은 돈을 받고 가르치기 때문에 단기완성이 목표고 당장에 성적을 올려야만 하지만 학교는 그와는 달리 적어도 1년 동안은 차분히 계획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며 "그런 공교육의 장점을 살리면 얼마든지 교실에서의 논술수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공교육 교사들의 자각은 논술 수업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남렬(51.(右)) 한대부고 교감은 이달 초 '대학입시 진학지도 길잡이' 책자를 발간했다. 고3 담임교사들이 학생들의 대학 진로를 결정하는 데 참고할 대학 배치표 등 대입 자료였다. 이 교감은 이 책자를 서울 시내 고교에서 진학지도를 맡고 있는 동료 교사 62명과 함께 만들었다. 학원 측에선 "교사들이 만든 게 오죽하겠느냐"며 비아냥댔다.

결과는 딴판이었다. 13일 수능 성적이 발표됐을 때 이 교감 등이 내린 진단과 예측이 대형 입시학원들보다 훨씬 정확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이 교감은 "학생들의 입시지도를 학원에 맡기고 학교는 팔짱만 끼고 있어야 한다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교감과 62명의 교사가 수능 직후 보름 이상 숙식을 같이하며 자료를 만들었던 이유는 바로 '공교육의 자존심'이었다. 이 교감은 진학지도를 20년 이상 한 베테랑이다. 1997년부터 EBS 수능특강 강사로 언어 강의를 했다. 그는 "나는 끝까지 공교육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강홍준.김은하 기자

프랑스 반성 끌어낸 과학수사
한면수 국과수 과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면수(47.사진) 유전자 분석과장은 한국 과학수사의 역량을 세계에 알렸다. 7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 서초동 서래마을의 영아 유기 사건의 진상을 캐낸 게 계기였다. 이 사건의 결정적 단서는 유전자 분석 자료였다. 한 과장은 아기 사체가 발견된 집에서 나온 귀이개.칫솔 등을 검사해 유전자 샘플을 채취했다. 이어 샘플에서 나온 유전자를 아기들의 유전자와 대조해 아기 엄마는 집주인 쿠르조의 부인인 베로니크(39)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 확보로 베르니크는 사건의 주요 용의자가 됐다.

당시 베로니크 측과 프랑스 경찰은 "한국의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자체 검사를 위해 영아들의 유전자 샘플을 요구했다. 결국 국과수의 수사 결과가 옳았음이 확인되자 프랑스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몽드는 "프랑스 경찰.사법당국.언론.여론은 모두 건방진 시선으로 한국의 수사 결과를 무시했다"고 자책했다. 생물공학 박사인 한 과장은 "한국의 유전자 분석 수준은 상위 20위 안에 속한다"며 "영국의 법의학연구소가 10개의 담배꽁초에서 평균 4개의 유전자를 채취하는 데 비해 우리는 그 두 배인 8개를 얻는다"고 말했다.

노조에 적용한 '무노동 무임금'
박철 외대 총장

한국외국어대 박철(57.사진) 총장은 우리 사회에 원칙의 힘을 보여 줬다. 무려 215일을 끌어온 외대 직원노조의 장기파업에 '인사권 양보 불가'와 '무노동 무임금'이란 원칙으로 맞서 결국 노조의 자진 철회를 이끌어냈다.

대학가에서 강성으로 꼽히는 외대 노조가 4월 6일 전면파업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노조의 우세가 예상됐다. 민주노총이 파업 지원에 나서고 파업 장기화로 도서관 대출, 취업 지원 등 학사업무가 마비되면서 학교가 노조와 타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법과 상식에 어긋난 타협 불가"를 천명한 박 총장은 단호했다. 노조와 타협하는 대신 파업노조원의 임금 40억원을 도서관 리모델링과 학생 장학금에 쓰겠다는 결정을 내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천명했다. 학생과 교수들도 자발적으로 도서관 대출 업무와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며 그의 원칙을 지지했다. 학교 구성원에게 외면당한 노조는 결국 박 총장의 원칙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7개월간의 파업을 끝낸 직후 박 총장은 "대학은 원칙을 가르치는 곳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떼법'이 기승을 부리는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값진 원칙의 승리였다.

"폭력시위 안 된다" 현장서 호소
이정화 '전.의경 모임'대표

각종 폭력시위로 몸살을 앓은 올해 평화시위 정착을 위해 전.의경 부모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전.의경 부모 모임'의 이정화(50.여.사진) 대표가 그 주인공. 2004년 10월 아들을 전경으로 보내고 마음 졸이던 이씨는 지난해 5월 인터넷에 '전.의경 부모 모임' 카페를 만들었다. 당시 울산 플랜트 노조 파업 시위에 파견됐던 아들로부터 "정부도, 경찰도 이곳의 폭력시위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 1월 평화시위 정착을 촉구하며 700여 명의 부모가 모여 경찰청에서 성명서를 낭독했지만 폭력시위는 여전했다. 평택 대추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이번엔 '아이들이 다쳐요'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직접 시위현장에 나가 참관단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한 모임은 현재 5000여 명을 넘어섰고 자유주의연대.바른사회시민회의 등과 연계해 '평화시위연대'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평화시위 정착을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이씨는 "일부 시위대에 '어용'으로 몰려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아들들을 위한 마음이 더 간절해지더라"며 "폭력시위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작은 힘이라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위해 하천 물길 바꿔
조욱래 창원시 공무원

경남 창원시청 재난안전관리과 하천 담당 조욱래(40.토목 7급.사진)씨는 공무원 한 사람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조씨는 7월 말 경남 창원공단 포스코 계열사인 창원특수강㈜의 공장 부지난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해결해 줬다. 회사 내 빈터를 관통하는 적현천(길이 774m, 폭 10m)의 물길을 돌려 공장 부지를 확보해 준 것이다.

종업원 2000여 명이 스테인리스 선재(線材) 생산량 세계 1위(연간 1조1421억원)를 기록하고 있는 창원특수강은 2010년까지 공장을 증축하지 않으면 중국 업체에 뒤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국내에서 공장 증축이 불가능하다면 해외로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조씨가 이 회사로부터 하천을 복개해 공장을 짓겠다는 신청을 받고 검토한 결과 복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하천 정비법은 원칙적으로 하천 복개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물길을 공장 부지 경계 쪽으로 돌리고 하천을 메워 공장을 지으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유량 확보 문제점 등으로 난색을 표하는 환경부를 10여 차례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유로(流路) 변경허가를 받아 냈다.

창원=김상진 기자<daedan@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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