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귀 막고 대화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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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런 모임이 끝난 뒤 취기에 살짝 얹혀 밀려오는 느낌이 있다. 소통(疏通)의 만족감이다. 상대는 내 말에 귀 기울이며 맞장구쳤고, 나 역시 상대의 말을 아무런 방어막 없이 맨몸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했다. 간혹 의견이 달라 논란이 벌어져도 불쾌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신뢰감 덕분이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무가내식 우격다짐이나 지루한 동어 반복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면 반드시 사람 좋은 누군가가 나서서 "한 잔 하고 나서 얘기하지"라며 분위기를 눅여 놓았다.

소통의 만족감이 가실 때쯤 마지막으로 반갑지 않은, 씁쓸한 뒷맛이 꼭 찾아온다. 꼭 이렇게 지연.학연 따위에 기대야만 소통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역시 인브리딩(inbreeding.동종교배) 체질일까.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사회일까.

말하는 일의 전문가라면 역시 아나운서나 성우다. TBC.MBC를 거쳐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38년 경력의 베테랑 성우 한상혁씨는 "족집게 도사는 아니지만 상대가 말하는 투를 보면 직업을 대강 맞힐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며 말하라'는 평범한 원칙이다. 전화를 할 때 상대방이 잘 알아듣도록 또박또박 발음하는 사람은 대개 말에 익숙한 직업인이라고 한다. 아나운서.성우.탤런트나 교사.교수.변호사들이다. 목소리의 타고난 색깔이나 굵기.높낮이는 그 다음의 문제다. 한씨의 경우 힘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여서 애니메이션에서는 저팔계('서유기')나 메기('개구리 왕눈이'), 외화 더빙의 경우 잭 니컬슨.앤서니 홉킨스 등을 주로 연기했다고 한다.

"교양 정도가 낮을수록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 바쁘다"고 김지은 MBC 아나운서도 지적했다. 국어건 외국어건 유창한 말투가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하고 싶은 말만 해대는 것으로 오해받기 쉽기 때문이다. 차라리 상대가 잘 알아듣게 또박또박 발음하는 편이 훨씬 신뢰를 준다. 김 아나운서는 "내 경험으로는 지적인 사람일수록 발음이 분명하고, 말하는 속도도 약간 느린 편"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두 귀 틀어막고 대화하는 시늉만 내는 사회다. 말이야 다들 유창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주르륵 쏟아내고 나면 상대의 대답은 들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상대가 입을 여는 동안 다음 차례에 내가 퍼부을 말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내 입장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장면이 흔하다. 그러니 대화가 이루어질 리 없다. 말뿐 아니라 글도 마찬가지다. 가위 최악의 소통 부재 상황이다.

독재 시대에는 그래도 귀엣말이라는 게 있었다. 그 시절의 글에는 행간(行間)이라는 묘약도 있었다. 지금은 각자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엉성하게 조준한 대포를 펑펑 쏘아대고는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자축하는, 희한한 대화법이 판치고 있다.

집단에 속한 목소리 큰 사람들이 하나같이 귀마개를 하고 다니니 중간지대 시민들은 짜증스럽기만 하다. 자연히 극단을 배격하는 심사가 쌓이고, 분노로 번지게 된다. 한 모임에서는 친구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었다. "평택 대추리 시위를 보고 미군기지를 옹호하게 됐고, 반(反)FTA 도심 시위를 겪고 FTA에 찬성하게 됐으며, 전교조의 연가투쟁을 보고 그들에게 내 아이를 맡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2007년이 보름 남짓 남았다. 짐작하건대 대선이라는 괴물이 기다리는 내년에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 풍조는 더 심해질 것이다. 박혀 있는 귀마개부터 각자 빼내지 않으면 어떤 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난장판을 면하기 힘들 듯하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회, 제대로 대화할 줄 아는 2007년이 되길 고대한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