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덮어질 수 있겠는가/권순용(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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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진실의 실체는 바윗덩어리에 짓눌린 풀씨처럼 언젠가는 겹겹의 포장도 뚫고 나오게 마련이다. 아무리 무서운 힘으로 철통같이 틀어막을 수 있었던 암흑시대의 그것도 시간의 문제일 뿐 마찬가지다.
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공개된 사회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깨우치는 교훈이다.
무엇으로 진상을 덮어줄 수 있겠는가. 두 손바닥과 세치 혀로 만인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사냥개에게 쫓기던 꿩이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덤불속에 머리만 쑤셔박는 어리석음과 다르지않다.
수서사건은 그런 시대가 지나갔음을 아직 인식치 못한 사람들이 벌인 합작추태극이었다. 무엇이든 덮어질 수 있다고 믿는 시대착오적 발상의 소유자들이 어우러져 벌인 한판의 부패경연대회였다고나 해야 마땅한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시종했다. 그들이 모두 정치·경제·관료사회의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이었으니 우리사회의 극에 달한 도덕적 타락을 개탄하고 체제위기를 걱정하는 소리가 드높은 것 또한 무리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번 사건은 수천억원의 이권이 걸린 부동산투기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경유착의 표본이었다. 유착의 과정에서 먼저 관계자들은 모두가 슬쩍 덮어져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사건이 노출된 뒤에도 끝까지 서로가 손가락질을 해대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 했다.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통해 노출된 구조적 부패의 규모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 5명을 포함해 유수대기업 총수와 청와대비서관까지 모두 9명이 구속되는 사태도 예삿일이 아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사건의 전과정을 통해 보여준 그들의 작태다. 국민복지를 최우선의 명제로 삼아야할 주무행정부처나 이를 감독해야할 청와대는 물론 정부의 잘못을 견제해야할 국회와 충실한 비판자로서 기능해야할 제1야당까지도 그 고유의 사명은 내팽개친듯 국민의 불신만 계속 증폭시켜왔다.
이번 사건이 남긴 가장 큰 불행은 국민이 믿고 기댈 언덕을 잃은 일이다. 국민들은 바보취급을 당한 배신감마저 금할 수 없게 됐다.
공영개발한 땅을 특혜공급키로한 서울시의 결정부터가 그랬다. 걸프전으로 온국민의 시선이 중동에 가있는 동안 2년여를 끌어온 현안을 결정,발표했다. 슬쩍 넘겨보겠다는 구시대의 발상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그것부터가 떳떳하지 못했다. 마침내 말썽이 되기 시작하자 현·전직 시장이 공개적으로 책임전가를 해대는 전례없는 추태까지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언론의 끈질긴 추적으로 실체적 진실이 껍질을 벗고 있는데도 연루자들은 한결같이 안타까울 정도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려했다. 청와대의 첫 반응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시의 결정에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서관의 행적이 보도기관에 의해서조차 추적되고 있었는데도 내부에서는 몰랐다고 했다. 그것이 결국은 더 큰 의혹의 씨를 키운 결과가 된 셈이다.
정당들의 대응태도는 한술을 더 떴다. 마치 자기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 되기라도 하는양 민망할 정도로 구시대적 수법에 집착했다.
정치권 공멸의 위기를 함께 걱정하기는 커녕 정치인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신뢰성이나 도덕성조차 팽개친듯한 그런 것이었다. 민자당의 어느계파 보스는 자파의원만을 두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나섰다. 결국 그 의원은 뇌물수수사실이 며칠뒤 확인돼 구속됐다.
평민당은 더욱 솔직하지 못했다. 한보측으로부터 2억원을 받고도 이를 숨겨오다 검찰수사에서 드러나자 뒤늦게 공개한 이원배 의원의 「양심선언」을 통해 이를 시인했다. 그 돈은 정치헌금이냐,수서청원처리 사례뇌물이냐에 관계없이 현행법상 위법이다. 한보돈인줄 몰랐다지만 그만한 돈을 받고도 출처를 알려하지 않았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자신의 치부가 다 보이는데 상대방을 손가락질한다고 해서 누가 따르겠는가. 이의원의 「양심선언」은 공개시기가 그 의도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검찰수사에서 2억원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에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다. 12일에 작성돼 16일 발표때까지 당지도부가 보관했었다니 그 내용을 당에서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혹때문에 이의원의 「양심선언」은 그 형식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뢰성을 갖지 못하게 됐다. 더구나 청와대관련설과 같은 「중대정보」도 1월20일 『신문이 자꾸 떠드니 걱정이라고 했더니 정회장이 알려줬다』는 사실자체가 객관성을 잃고 있다. 20일은 언론에 수서이야기가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평민당이야말로 이번 사건과 같은 대표적 정경유착의 비리를 폭로하고 국민의 편에서 견제했어야할 야당이다. 그런데도 그 유착의 공범이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평민당으로서는 솔직히 잘못을 털어놓고 설득력있는 대여투쟁에 일찍이 나섰어야 했다. 도덕성을 상실하고 떳떳하지 못한 야당이 설 자리는 없다.
이번 사건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일부에서는 언론이 지나친 확대보도로 체제까지 흔드는 위기의식을 부추긴다는 소리도 들린다. 적당히 덮어달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 영원히 덮어지는 진실은 없다.
따지고 보면 더 크고 많은 비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택을 담보로한 수천억 이권의 부동산투기에 행정부와 입법부가 본분을 망각한채 놀아난 수서사건이 결코 작은 사건은 아니다. 무엇으로도 덮어질 수 없는 사건이다. 체제는 위기를 경고하는 장치가 활발히 작동할 때만이 건전하게 발전한다. 비리는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닥까지 드러낼 때만이 근원적 치유가 가능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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