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월드컵 4강' 주역들 동판에 새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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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재봉씨가 기증식에서 동판을 들고 있다.[수원=최승식 기자]

지재봉(池在鳳.53)씨는 40년 넘게 금형(金型)조각 한 우물만을 파온 '장인(匠人)'이다. 서울 종로3가에서 '정광사'라는 조각 공장을 운영하는 池씨는 1986년 아시안게임.88년 올림픽 기념메달과 역대 월드컵 포스터 미니어처, 2002년 한.일 월드컵 기념 주화와 메달을 제작했다. 또 박정희.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의 초상이 들어간 기념 메달도 만들었다.

이런 池씨가 최근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태극전사 23명과 거스 히딩크 감독의 얼굴을 동판에 새기는 작업에 힘을 쏟았다. 24개의 동판을 완성한 그는 6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있는 월드컵 기념관에 이를 기증했다.

다섯명의 직원이 꼬박 한달 반을 매달렸고, 제작비만 4천만원이 넘게 든 이 작품을 선뜻 내놓은 이유를 묻자 그는 "그날의 벅찬 감동과 하나된 기쁨이 너무 빨리 잊혀지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1백% 황동판에 돋을새김(陽刻.양각)을 해 녹이 생기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얼굴을 표현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선수를 묻자 池씨는 대번에 "안정환"이라고 대답했다. "잘 생긴 사람일수록 특징을 잡아내기 힘들어요. 안정환 선수 얼굴을 잘못 파면 탤런트 차인표씨가 되거든요."

홍명보.황선홍 선수도 미남형이라 작업이 쉽지 않았단다. 반면 히딩크 감독은 서양인이라 얼굴의 굴곡이 분명하고 워낙 인상이 강해 쉽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50년 서울에서 태어난 池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먹고 살기 위해' 금형 일에 뛰어들었다. 그림과 조각에 재주가 있는 그였지만 수련 과정은 혹독했다.

그는 국내 최초의 주화 제조 과정도 지켜봤다.

"63년께 朴대통령이 10원짜리 주화를 만들라고 해 우리 공장에서 금형을 했어요. 당시는 다보탑이 아니라 첨성대를 새겼는데 질이 좋지 않다며 채택되지 않았죠. 그런데 그때 만든 10원짜리 주화는 1백만원을 줘야 구할 수 있죠."

대통령이 외국 손님에게 주는 기념 메달도 모두 池씨의 손 끝에서 만들어졌다. "대통령 얼굴은 눈매가 중요하죠. 너무 날카로워도 안 되고, 인자하고 덕망 있으면서도 위엄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도록 표현해야 합니다. 특히 '절대권력'이었던 朴대통령 당시는 주문이 무척 까다로워 힘들었어요."

池씨는 88올림픽 포스터 미니어처를 제작하면서 글자 한 자를 빼먹은 적이 있었다. 시중에 수십 세트가 판매된 뒤 구입한 사람이 "글자 한 자가 빠졌다"며 항의해왔다. 깜짝 놀라 다시 제작해 바꿔주겠다고 하자 "잘못된 게 더 희소가치가 있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정영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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