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바위꾼은 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1면

작가 황석영씨는 암벽 등반을 즐기지 않았을까.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등단작품 '입석부근'은 그가 일찌기 만만치 않은 등반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자신의 몸을 움직여 바위를 올라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내용들을 그 작품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스물 몇 살 시절, 의미도 모르고 읽었던 등반의 과정과 몸짓들이 다시 읽는 지금은 구체적 영상으로 떠오른다. 손짓 하나 발짓 하나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 걸 보면, 그도 바위를 오를 때의 몰입이라는 지경의 불가해함에 꽤나 천착했지 싶다. 1960년대와 2000년대, 등반 장비와 시스템은 달라졌어도 바위를 오를 때의 정신세계만큼은 시공과 주체를 뛰어넘어 연대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60년대 등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암벽화 아닌 구두를 신고 자일.하켄(바위틈에 망치로 때려 박아 설치하는 확보장비).카라비너 정도의 보잘것없는 장비에 의존해 거대한 바위에 맞서는 이들. 작품 속의 비장한 죽음을 포함해, 인수봉과 선인봉 곳곳에 동판으로 남아있는 이들의 살았을 적 모습이다. 이것이 작가의 고교 시절 작품임은 또 다른 놀라움이지만, 그의 삶을 떠올리면 젊은 날 바위를 오르며 길렀을 통찰력이 그의 삶 한 귀퉁이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어떤 분야에 빠져버린 사람이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절차가 있으니, 바로 그 '역사'에 다가서고자 함이다. 번쩍거리는 최신의 것보다 오래된 것에 관심이 가는 이유도 그것이다. 직장인 L씨는 함께 등반하는 동료들 중 가장 '올드(old)'한 등반인이다. 그가 '올드하다'는 것은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오랜 경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나이는 아래지만 등반으로 따지자면 20년차가 훌쩍 넘은, 내 주변에선 보기 드문 대학 산악부 출신이다.

그의 내부에는 등반인과 생활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오랫동안 등반하면서 그가 얻은 통찰은 자유로움이다. 그가 가진 보잘것없고 오래된 장비들, 그것들로 어떤 코스든 스스럼없이 오르는 자연스러움,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는 듯 수그린 구부정한 어깨, 바위가 있고 오르니 다만 즐겁지 아니하냐는 듯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웃음, 열중하되 집착하지는 않는 여유로움, 그리고 대장도 없고 졸병도 없는 그와 그의 동료들. 장비로부터 자유롭고,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고, 또한 등반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그에게서 등반의 한 시대를 건너온 자의 기품을 본다.

잘은 모르지만, 삶이 등반으로 점철되지 않음으로써 황석영씨는 우리 문단에 참으로 큰 성과를 남기게 됐으리라. 하지만 그를 통해 등반을 보는 것이 '입석부근'으로 끝난 것은, 나처럼 지나온 것을 보고자 하는 이에겐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 indymk@empa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