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믿지말고 돈 풀어라”(「예체능입시」를 벗긴다: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저명교수사단」강사 합격중개/레슨 안받고 즉석 흥정땐 5천∼1억원설/돈 많아도 줄 잘못잡으면 낭패
예체능계 입시가 연줄과 금력이 판을 치는 복마전이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왔다. 이번 서울대 음대 입시부정사건은 방치상태에서 곪을대로 곪은 상처가 마침내 터진 것이라는 지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 도덕성 회복에 앞장서야 할 대학의 재건과 예술·예술인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이 기회에 부정·비리가 횡행하는 예체능계 입시에 본격적으로 메스를 대야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예체능계 입시,무엇이 문제인지 시리즈로 엮어본다.<편집자주>
올해 S대 음대 피아노과를 지원했다 낙방한 일반고출신 L양의 어머니(47)는 사건보도가 있은뒤 중앙일보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딸이 떨어진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고 진정해왔다.
『내신 1등급에 학력고사점수가 2백60점이고 레슨을 맡은 S대 김모교수로부터도 괜찮은 실력이라는 평을 들었으나 시험 보름쯤전부터 「아버지가 무엇하는 분이라 했느냐」「오늘 제자인 강사 20여명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는 등의 금품 요구 암시를 경험도 없고 능력도 부족한 탓으로 대충 들어넘긴 것이 실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일반고 학생의 경우 「깜짝 놀랄만한 액수」의 현찰박치기 없이는 평소 학교수업등을 통해 저명교수들과 「긴밀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예고 학생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데 그것도 모르고 겁없이 예능계입시에 뛰어들었다며 몹시 후회했다.
이 학부모의 생각은 오해일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자·학부모들은 L양의 어머니 생각이 잘못됐다고 보지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실력을 믿지말고 돈을 믿어라.』
예체능계 수험생과 학부모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격언(?)이다.
그동안 예체능계 입시부정에 대한 갖가지 소문은 수험생 학부모나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조차 대강을 짐작할만큼 무성했다. 그러나 제대로 공개되거나 문제된 일은 거의 없다. 부정당사자 쌍방의 철저한 비밀유지,예체능 특유의 전문성·폐쇄성 때문에 그저 「설」로 끝났다.
이번 서울대 사건이 터진 후 예체능계 인사와 학부모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번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프로는 다 빠지고 서투른 아마추어만 걸렸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예체능계 입시의 뿌리깊은 부패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E여대 출신의 피아노 레슨교사 정모씨(27·여)는 『음악계에는 저명한 교수를 정점으로 전임강사·시간강사·대학원생 등이 모인 이른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이 조직원들이 레슨받는 수험생과 「모시고 있는」교수와의 합격흥정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제대로 된 「줄」을 잡지못하면 합격은 어렵다』고 했다.
H대 음대 김모교수(40)는 『레슨과정에서 일찌감치 「후견 교수」를 정하지 못하고 입시가 임박해 돈으로 승부할 결심을 한 경우에는 특정교수를 찾아가 다짜고짜 5천만∼1억원의 목돈을 안기고 붙여달라고 떼쓰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서울대 음대 입시부정에서 최고거래가격은 8천5백만원,최하는 음대강사가 자기딸 합격을 위해 「바리케이드」로 제공한 2천만원이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분야·다른 대학에 정도와 액수의 차이일뿐 거의 공통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사회에서 예체능,특히 예능교육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돈놀음·돈싸움으로 변질돼 있는 것이다.
예체능계 입시부정과 비리는 실기시험을 둘러싸고 빚어진다.
실기시험은 보통 입시총점의 30∼50%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그 평가는 철저히 주관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눈·귀로 느끼는 것이 바로 점수일뿐 실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는 없다.
이에 따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녀를 대학에 넣겠다는 일부 부유층 학부모와 학자의 양심,예술가의 긍지를 내팽개친 일부교수가 의기투합하다보니 어느덧 「뒷거래」가 관행으로 정착되어버린 것이다.
이같은 부정·비리는 음악·미술·무용 등 각 분야가 다 비슷하지만 특히 기악(주로 관악기)에서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동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