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잊고 국익 챙기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실리외교. 올해 주요국 정상들의 분주했던 발걸음은 지구촌 곳곳에 이 말을 깊게 새겨놓았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실리란 외교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몸소 보여 주었다. 자국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정상들이 취한 메시지는 '과거는 잊어라' '에너지가 힘' 두 가지였다. '자주'를 외치며 명분 외교에 매달렸던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 과거는 상관없다=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17일부터 나흘간 베트남에 머물렀다.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서였다. 해외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그가 나흘씩이나 한 나라, 그것도 가장 오래 전쟁하고도 패배한 나라에 체류한 건 이례적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증권거래소를 방문하고 다양한 기업인들을 만났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직전 그는 베트남에 정상적인 무역관계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의 조기 통과를 의회에 요청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성장 가능성으로 볼 때 미국 기업들이 진출할 여지가 많은 데다 베트남을 통해 동남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같은 회의에 참석한 후진타오 중국 주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농득마인 총서기에게 '산수상연(山水相連) 문화상통(文化相通) 이상상동(理想相同) 명운상관(命運相關)'이라는 16자를 전달했다. 국토가 맞닿아 있고 문화가 서로 통하니 추구하는 이상도 같아, 양국의 운명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후 주석에게 베트남은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이 모두 공항에 영접 나오는 극진한 환대를 베풀었다. 그리고 두 정상은 36억 달러 규모의 포괄적 경제협약에 서명했다. 1979년 두 나라가 난사군도(스프래틀리군도)의 영유권을 놓고 총부리를 맞댔던 일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중국과 미국도 마찬가지다. 2001년 1월 중국 남부 하이난다오(海南島) 인근 상공에서 미국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해빙 조짐을 보이다 마침내 올 9월에는 미국 샌디에이고 부근에서 양국이 첫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달 19일에는 중국 해군의 잔장(湛江)호와 둥팅후(洞庭湖)호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피츠제럴드호와 함께 남부 하이난다오 부근 해역에서 2차 합동훈련을 벌였다. 양국 군이 손잡은 이유 역시 실리다. 양국 간 군사협력이 테러 예방과 해상 안전 확보에서 서로 실익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취임하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로 한참 꼬였던 중국과의 관계를 푼 것이다. 그는 전임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와는 달리 국익을 앞세운 전략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 에너지가 힘이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세계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이자 세계 2위의 원유 생산국이란 에너지 대국의 지위를 십분 활용, 올해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주가를 한껏 높였다. 7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을 처음 개최한 것이 단적이 예다. 고유가로 막대한 오일 달러를 쌓으면서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다. 러시아는 또 자국과 우호적인 나라에는 에너지 공급 약속이란 '당근'을, 비우호적인 국가엔 에너지 공급가격 인상이라는 '채찍'을 사용하는 이중 전략을 활용해 실리를 극대화했다.

후 주석을 수행해 APEC에 참석했던 마카이(馬凱) 중국국가개발개혁위원회 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인도 뉴델리에서 무를리 데오라 인도 석유장관을 만나 해외 석유자원을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쓸데없는 경쟁으로 자원 보유국만 이롭게 하는 일은 피하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미국은 지난달 28일부터 인도 뭄바이에서 열리는 경제장관회담에 맞춰 사상 최대 규모의 무역사절단을 파견했다.

프랭클린 라빈 국제무역담당 차관이 수석대표를 맡은 사절단에는 GE.웨스팅하우스.벡텔 등 미국을 대표하는 186개 기업 대표와 관계자 240여 명이 포함됐다. 이에 앞서 미 상원은 인도에 민수용 핵 연료와 기술 판매를 허용하는 양국 간 핵협정 법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전 관련 업체들은 1000억 달러에 이르는 인도의 핵 에너지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베이징.워싱턴.도쿄=진세근.강찬호.김현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