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관이장|정치권 외풍심해"잘해야 본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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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선거에 대한 우리국민의 관심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서방 선진국들의 경우 50∼60%의 투표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지난 대통령선거 때 89.2%, 13대 총선 75.8%라는「경이적」인 투표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선거만 치렀다하면 국가의 경제· 사회기능이 크게 영향을 받는 현상들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국민의 높은 참여도와는 달리 선거를 치를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점도 우리 선거문화의 또 다른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4·19학생의거를 촉발시킨 자유당정권시절의 3·15부정선거를 필두로 최근에는 87년 대통령선거의 컴퓨터부정시비가 그렇고 동해·영등포 을 재선거, 대구보궐선거의 돈 봉투사건에 이르기까지 선거부정시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의 전 과정을 챙기고 관리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과 책무는 선거때마다 공정성과 중립성이 강조돼왔고 특히 선관위를 지휘하는 중앙선관위원장의 정치적 성향과 업무스타일은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사로 부각돼온 게 사실이다.

<제대로 예우 못 받아>
왜냐하면 중앙선관위원강의 성향과 성품에 따라 선거관리업무의 집행스타일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야당은 물론 집권 여당에도 정치적으로 일대 타격을 가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중앙선관위원장이라는 자리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정치권의 바람, 특히 권력의 바람을 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선관위의 주업무가 선거관리·정당사무관리·정치자금관리와 같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선거에서 패한 쪽으로부터는 선거관리의 공정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정치적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높은 평판을 받기가 매우 힘든 자리라는 점이다.
선거관리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여야 모두로부터「너무 고지식하고 까다로우며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며 특히 집권 여당의 눈에 거슬리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리를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대법원판사 혹은 대법관이 맡는 역대 선관위원장 중 단 한 명도 대법원장에 임명된 사람이 없고 오히려 선관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 때문에 차기대법관 임명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당한 위원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중앙선관위원장직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법조계에서 정실로 통용되고 있는 점이나 대법관들 사이에 선관위원장직 기피현상이 일반화 돼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법관의 기본업무는 업무대로 봐야하는 중앙선관위원장직은 과외업무나 다름없고 무보수·비상근의 명예직이면서도 정치적 바람을 타게되니 그 자리를 탐낼 사람이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중앙선관위원장직의 또 다른 특징은 헌법기관의 장이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가 국회출석.「선관위원장은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과 같이 특정한 사안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만 출석을 요구할 수 있다」고 국회법에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중앙선관위원장만은 국회의 특별한 출석요구가 없더라도 정부의 국무위원과 같이 상임위에 출석하여 업무보고와 답변을 해야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불만은 역대위원장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으며 제8대위원장을 지낸 이회창 위원장시절에 폭발, 정치권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위원장는 89년5월 국회 정간성 내무위원장에게 보낸 장문의 답변서한을 통해 선관위원장의 국회출석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현재 대법관의 업무량은 한달 평균 50∼60건의 제반사건을 처리해야 할 만큼 많아 퇴근 후 집에서도 업무를 보아야함은 물론 주말에도 거의 사건기록에 파묻혀 지내는 실정이며 거기에 중앙선관위원장직을 겸하고 있으니 얼마나 과중한 일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 고충을 토로한바 있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현 중앙선관위원장인 윤착 위원장을 비롯, 이회창 위원장 등 대부분의 전 현직위원장들은 선관위원강의 자리에 대해『참으로 어렵고 힘든 자리』라며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어렵고도 힘든 자리」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독립성·공정성·중립성을 표방하는 중앙선관위의 고유 성격과는 달리 직권여당 측에 음양으로 협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나름대로의 말못할 고민도 그 이유중의 하나라는 것이 법조계의 해석이기도 하다.
선관위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요즘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유신정권,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5정 조기에는 철권통치의 특성 때문에 중앙선관위의 역할이 그저 단순한 선거 또는 국민투표의 투·개표 관리나 맡고 결과집계에 그치는 유명무실한 때도 없지 않았다.
중앙선관위가 창설된 63년1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원강직을 맡았던 대법관은 사광욱 초대위원장을 비롯, 주재황·김중서·강지영·윤일영·이회창·윤관 위원장 등 모두 7명.
이중 주재황위원장은 68년2월 제2대위원장으로 초선 된 이래 3대(73∼78년),4대(78∼81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3년2개월 간을 중앙선관위원장자리를 맡아 최장수 위원장을 기록했다. 가장 단명한 위원장은 동해·영등포 을 재선거 불법타락의 도의적 책임을 이유로 스스로 사퇴 서를 던진 이회창 제7대 위원장으로 1년3개월.

<연두순시 정면거부>
역대 선관위원장 중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위원장은 사광욱 초대 위원장이었다.
사위원장은 64년 박정희 대통령이 각 부처 연두순시 때 중앙선관위도 순시하겠다고 하자 『헌법기관인 중앙선관위를 행정부의 장인 대통령이 어떻게 순시할 수 있느냐』며 정면으로 거부, 결국 박대통령의 연두순시를 좌절케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위원장과 박대통령의 마찰은 3년 뒤인 67년 국회의원선거 때 재연된다.
사건의 발단은 대통령이 자당후보의 지원유세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를 놓고 법률적 논쟁에서 비롯됐는데 당시 사 위원장은『대통령은 공무원 신분이므로 선거지원 활동을 할 수 없다』며 대통령 지원유세 불가로 유권해석을 내리고 말았다. 노발대발한 박대통령은 중앙선관위원들에게 압력을 넣어 사 위원장의 유권해석을 번복시키게 했고 행정부는 선거법 시행령을 개정해 대통령의 선거지원활동을 가능케 했다.
이듬해 국회에서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사 위원장은 국회답변에서『선거법 시행령 개정은 권투경기도중 한편에 유리하도록 게임 룰을 바꾸는 것과 같다. 중앙선관위가 합의제이므로 표결결과가 그렇게 나와 어쩔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부당한 처사라는 것이 소신』 이라며 여권에 일대 타격을 가한 발언을 해 엄청 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서슬 퍼렇던 3공 시절에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을 궁지로 몰아넣는 등 자신의 소신을 피력할 만큼 대쪽같은 강직한 성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13년 2개월이라는 최 장수 기록을 지닌 주재황 제2∼4대 위원장은 3공 중반부터 5공 초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여섯 차례의 대통령선거, 네 차례 국회의원 선거,3선 개헌, 유신헌법개정, 5공 헌법개정 등 선거 10회·국민투표4회 도합14회의선거와 국민투표를 관리했다.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에서 좋든 싫든 유신헌법·3선 개헌, 5공 헌법 개정 등 오욕의 정치작업에 간여했던 탓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긍정론과 부정론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긍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어려운 정치상황에서도 선관위를 별탈 없이 끌어 왔다는 점을 평가하고 있다.
제5대 위원장을 지낸 김중서 위원장은 역대 선관위원장중단한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은 케이스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강지영 6대위원장은「신당돌풍」이 휘몰아쳤던「2·12」총선을 치르면서 야당후보들의 벽보문안 삭제사건으로 한때 곤욕을 치렀던 장본인.
야당후보들의 벽보에 당시 정치규제로 묶여있던 김대중·김영삼씨의 이름을 삭제토록 지침을 시달한 것이 화근이 돼 정치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고 결과적으로 신당 바람을 부추기는 셈이 됐다며 여권으로부터도 비난받아야 했다고 당시관계자들은 술회하고 있다.
6·29선언 이후 민주화과정에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13대)를 치러낸 윤일영 제7대 위원장은 중앙선관위 창설이래 처음으로 물리 력을 동원, 불법 벽보와 현수막을 철거하는 등 단호함을 과시했던 위원장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역대 선거 중 선거질서가 가장 문란했다는 비난과 함께 컴퓨터부정시비에 시달려야 했으며 중앙선관위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6공 출범 이후대법관 재임명 때 김영삼 당 시민주장총재로부터「부정선거의 원흉」이라는 공격을 받아 대법관 임명에서 탈락하는 불행을 간수해야만 했다.
역대 위원장 중 자진사표를 제출한 유일한 인물로 꼽히는 이회창 8대위원장은 동해시·영등포 을 재선거를 치르면서 우리 선거사상 처음으로 후보전원을 선거법위반혐의로 고발조치, 정치권에 일대 충격을 가한「강직하고 소신 있는 위원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회창씨 자진사퇴>
이 위원장은『선거관리는 선거시설 준비나 투·개표 관리 등 단순한 업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당선자가 선출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적극적 선거관리」개념을 도입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매사를「칼날」처럼 처리하다 안되면 집어던지는 것이 한국적인 현실에서 꼭 올바른 공인의 길이냐는 비판도 있으며 이 같은 기질 때문에 이번 대법원장지명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이 위원장의 사퇴로 인해 89년10월 제9대위원장으로 취임한 윤관현 위원장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좌고 우면 하지 않는「소신파」라는 평을 받고있다.
대구·진천-음성보궐선거를 치르면서 정호용 의원사퇴압력, 돈 봉투사건 등으로 호된 곤욕을 치르긴 했으나 영광-함평 보선을 모범적으로 치러내 일단 자신감이 붙었다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윤 위원장은 영광-함평 보선 과정에서 여당후보에게 군민회관을 장기 대여해 야당후보의 옥내집회를 불가능하게 한데대해 크게 분노, 영광 군수에게 경고 장을 발송하기도 했고 평민당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 기탁 자 명단 공개를 지금까지도 거부하고 있어 여야모두로부터「깐깐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금년 3월말 실시예정인 지방의회의원선거를 필두로 자치단체장·국회의원·대통령선거 등 각종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선관위원장의 책무와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윤 위원장의 역할에 비상한 관심이 쏠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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