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의료기술 못잡는 '요양급여기준', 백혈병 환자 두 번 울린다

중앙일보

입력

백혈병 환자에 대한 진료비 과다청구 문제를 놓고 백혈병환우회와 가톨릭대 성모병원, 그리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 간 진실공방이 뜨겁다.

백혈병 환자와 가족들의 모임인 백혈병환우회(대표 안기종)는 5일 오전 서울 만해 NGO 교육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의도 가톨릭대 성모병원이 그동안 환자들을 상대로 불법 과다징수한 수백억원의 치료비를 환급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가톨릭대 성모병원은 이날 오후 곧바로 연 기자회견에서 일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이는 빠르게 발전하는 첨단의료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의료제도(요양급여기준)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일 뿐 병원 잘못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급여원칙에 맞게 진료했는지를 평가하는 심평원의 요양급여기준 심사가 과연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가 앞으로 이번 논란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되돌아온 병원비 3000만원의 진실=김미정씨는 올해 3월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 치료를 위해 들어간 수천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전세금을 빼 임대주택으로 옮겼지만, 결국 허사였다.

문제는 그동안 낸 치료비에 대해 심평원측에 진료비확인요청을 한 결과 병원비 7000만원 중 2900만원이 과다징수됐다며 되돌아왔다는 것. 김씨는 “그 돈이었으면 남편에게 좀 더 좋은 약을 쓰고 좀 더 좋은 치료를 받게 해줄 수 있었을텐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백혈병환우회에 따르면 김씨와 같은 사례 20건을 모아 심평원에 진료비 확인요청을 한 결과 병원이 환자 한 명당 평균 2500만원을 돌려줘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중에는 본인부담금 7330만원 중 무려 4068만원을 환급받은 경우도 있다.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을 수천만원씩 병원에 치료비로 내왔다는 얘기다.

백혈병환우회는 이날 다른 환자 80명의 진료비에 대해서도 심평원에 확인 요청을 했다. 하지만 이들 중 5명을 제외하고는 이미 사망한 환자들이다.

백혈병환우회 안기종 대표는 “그동안 가톨릭대 성모병원에서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을 받은 4000여명의 백혈병 환자에게 이같은 환급률을 적용하면 400~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며 “가톨릭대 성모병원은 그동안 불법 과다징수한 치료비를 즉각 환급하라”고 요구했다.

◇병원vs심평원, 급여냐 비급여냐 논란=백혈병환우회는 이같은 병원비 환급사태의 책임이 병원과 복지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심평원은 백혈병환자 10명에 대한 진료비 환급결정 이유로 ‘보험적용되는 사항을 비급여로 징수한 경우’가 72%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이어 ‘식약청에서 허가받은 사항 이외도 비급여 징수한 경우’(18%), ‘선택진료비를 신청하지 않았는데 신청한 것처럼 징수한 경우’(7%) 등을 꼽았다.

병원에서 일부 보험처리가 되는 약이나 진료행위를 비급여 항목으로 처리해 환자에게 청구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병원측 얘기는 다르다. 성모병원 김학기 부원장은 “백혈병의 특성상 환자의 중증도 및 합병증 여부에 따라 최선의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부분 건강보험 급여기준을 초과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생명을 다루는 의료현장에서는 급여기준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요양급여기준은 환자치료에 쓰이는 모든 약제에 대해 용량과 용법에 제한을 두고 있지만,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해당 약제를 초과 사용해야만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을 때 기준을 초과해 사용된 약물은 모두 비급여로 처리되고, 이에 대한 보험적용을 심평원에 요청하면 청구된 부분이 삭감된다는 게 성모병원측의 주장이다.

이와 함께 보험적용 여부를 판정하는 심평원의 심사기준도 병원이 제출한 요양급여심사 때와 민원인들이 진료비 확인 요청할 때가 제각각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 병원 보험팀 관계자는 “성모병원은 절대로 급여로 분류된 것을 비급여로 분류해 청구하지 않았다”면서 “다만 심평원이 비급여 부분에 대한 민원에 대해 사례별로 비급여를 급여로 ‘임의처리’해 줄 뿐, 원천적으로 그 사안이 급여 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심평원 민원상담팀 관계자는 “복지부에서 행정해석을 하거나 건강보험 법령에 명시적으로 요양급여기준이 나와 있는 것은 어디에서 심사하든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면서 “성모병원측에서는 급여항목을 신청도 하지 않고 심사기준 탓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급여기준대로 치료하면 완치율 떨어진다?=특히 성모병원은 “백혈병 환자의 치료를 현행 건강보험급여기준으로 한다면 환치율은 현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보험제도는 보편타당성을 기준으로 설정돼 있지만, 환자치료에 사용되는 모든 약제의 용량과 용법을 급여적용기준대로 적용할 경우 환자상태를 호전시킬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자 백혈병환우회는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요양급여기준에 따라 치료하고 있는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완치율이 떨어진다는 얘기냐”면서 “복지부와 심평원, 그리고 요양급여기준 제정에 참여하고 있는 의료계에서는 백혈병 환자들의 불안을 하루 빨리 해소해 달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요양급여기준에 대한 재설정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힘을 받고 있다. 보험적용을 통해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기 위해 출발한 제도가 정작 최선의 치료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가톨릭중앙의료원장인 최영식 신부는 5일 별도의 입장발표를 통해 “현재의 의료제도는 중증질환에 대한 보장성이 충분치 않으며, 특히 신약 및 신재료에 대한 급여화가 미진해 최선의 치료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요양급여기준이 빠르게 발전하는 첨단의료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의료계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도 일부 인정하면서도 보험재정의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복지부 이상석 사회복지정책본부장은 지난 10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진료기준의 경우 일부 기준이 의료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료기관이나 전문학회의 건의 등을 통해 수시로 개선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 괴리는 크지 않다”고 밝혔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한 임원은 “더이상 환자들이 경제적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 요양급여기준에 대한 대수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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