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원 - 엔 환율 하락의 빛과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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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하지만 기업과 경제분석기관들에선 원-달러 환율보다는 원-엔 환율을 더욱 우려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 하락의 영향이 제한적인 반면 원-엔 환율 하락은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화에 대한 원화 가치 상승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국내 기업을 압박한다. 우선 국내 시장에서 원화로 표시된 일본 제품의 가격이 떨어져 시장 점유율이 높아진다. 이미 일본산 대형차가 월간 판매 신기록을 달성하고 일본 여행 상품이 인기를 끄는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 철강.플라스틱.자동차도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 대일 무역수지가 나빠지는 산업이다.

반대로 일본 시장에서 국내 제품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일본에 대한 수출은 원-엔 환율이 900원대 초반에 진입한 지난해 9월부터 증가세가 둔화됐고, 850원대 아래로 떨어진 올 1월부터 사실상 감소세로 돌아섰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한.일 제품이 나란히 팔리는 세계 시장에서 국내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하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원-엔 환율이 1% 하락하면 한국의 수출이 0.821%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원-달러 환율이 1% 하락할 경우 수출이 오히려 0.886%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과는 정반대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떨어져도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세계 경기 호조로 수출이 오히려 늘어나지만 원-엔 환율 하락은 일본 제품의 가격 인하와 한국 제품의 가격 인상을 불러와 수출 감소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무역협회 무역연구소는 달러에 대한 엔화 가치가 10% 떨어지면 한국의 수출이 앞으로 4년간 매년 107억7000만 달러 줄어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원화에 대한 엔화의 상대적 약세가 가세할 경우 악영향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같은 추세는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합하고 있는 품목이 늘고 있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과 일본 상품이 세계 시장에서 경합하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수출경합도는 2000년 28.8%에서 2002년 42.7%, 2004년 46.1%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엔 이 비율이 50.6%에 달했다. 수출의 절반 이상이 일본 제품과 경쟁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주요 시장에선 이미 원-엔 환율이 가격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가장 타격을 많이 받고 있는 산업은 자동차다. 미국 수입차 시장에서 한국산의 점유율은 2004년 8.2%에서 올 들어 6.7%로 하락했다. 현대차의 미국 판매량은 지난 7월 이후 4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다. 반면 일본차는 같은 기간 중 26.3%에서 31.5%로 상승했다. 엔저를 무기로 일본 업체들이 달러로 표시한 가격을 자꾸 내리고 있는 반면 국내업체들은 허리띠를 졸라매 가격인상을 최소화하는 것이 고작이다. 현대차가 지난해 12월 미국 시장에 신형 액센트를 1만2565달러에 내놓자 일본 도요타는 올 3월 동급 차종인 야리스를 1만1925달러에 출시했다. 한국산 낸드플래시메모리의 세계시장 점유율도 2005년 하반기 이후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철강산업도 영향을 받는다. 국내 철강업계의 수출비중은 25%로 낮은 편이지만 중국 등 주력 시장이 겹치고 수출품목도 비슷하다. 업계는 엔화 약세로 가격이 낮아진 일본산 원료 수입을 늘려 손실을 만회하고, 결제방식을 다양화해 영향을 최소하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이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설비투자가 완료되면 수출시장에서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일본으로부터의 원료 수입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본산과의 경합도가 높은 플라스틱과 컴퓨터 역시 원-엔 환율 하락이 악재가 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원-엔 환율로부터 자유로운 업종도 있다. 반도체와 휴대전화.조선 등이다.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세계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가격 결정력을 쥐고 있다. 일본에 마땅한 경쟁업체가 없고, D램 등 주요 분야의 기술 수준이 일본을 앞지르고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점이다. 휴대전화는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세계 시장에서의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주요 경쟁 상대가 노키아.모토로라 등 미국.유럽 업체여서 일본의 영향을 작게 받는다. 한국과 일본이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은 주력 생산 품목이 서로 다르다. 한국이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과 해양설비 등을 주로 만드는 반면 일본은 전통적으로 컨테이너선과 벌크선에 주력하고 있다. 그나마 90% 이상이 내수용이다. 물론 원-엔 환율 하락이 국내산업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우는 것은 아니다. 국내 기업이 기계 등 생산재와 부품을 가장 많이 들여오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그만큼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가 환율 효과를 상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문제다. 대우증권 고유선 연구원은 "일본과 비슷하거나 뒤지는 기술로 동일한 품목을 수출하는 업종일수록 내수와 수출시장에서 일본 제품에 밀리고 있다"며 "정부는 원-엔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도 기술개발 등 비가격경쟁력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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