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 유고인 보따리장사 극성(세계의 사회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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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매주 천여명 몰려 호텔마다 북적/한번 나들이로 3천불 “거뜬”/의류·소비재 등 닥치는대로 싹쓸이
지난 89년 천안문사건이래 외국 투숙객이 현저하게 줄었던 중국 북경시내 호텔들이 유고슬라비아 손님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유고인들이 최근 다른 선진국 상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싼 중국상품을 대량으로 구입,본국에서 되팔아 얻는 막대한 차익을 노리고 연일 북경의 일류호텔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때 거상·재벌들로 북적거렸던 차이나월드호텔의 대리석 로비는 「화려한 하역부두」로 바뀐지 오래다.
호텔 로비에서 오키스트라가 모차르트를 은은히 연주하는 가운데 잔뜩 짐을 짊어진 보따리 장사꾼이 큰 나일론 가방을 끌고 오가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손님기근에 허덕이는 일류 호텔들은 하룻밤 숙박료를 50달러(3만6천원)까지 내려받고 있어 유고 보따리 장사꾼들의 활동근거지로서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매주 1천여명씩 북경으로 몰려드는 유고 장사꾼들은 실크셔츠에서 라이터·낚싯대에 이르기까지 유고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구입한다.
이 물건들은 유고의 암시장에서 되팔 경우 10배이상의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이 한번의 중국여행에서 얻는 평균 수입은 3천달러(2백13만원) 정도.
유고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이와 같은 큰 이익을 바탕으로 「값싼 일류호텔」에서 마치 부호처럼 생활하고 있다.
이들이 아침 뷔페식당을 휩쓰는가 하면 지갑에 돈을 잔뜩 넣어 갖고다니면서 뽐내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그런가 하면 한꺼번에 십여개씩의 치솔을 무료로 룸서비스에 주문해 몽땅 가져가기도 한다. 담요와 식기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북경시내 한 호텔이 방안에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여자 투숙객에게 돈을 환불해 주었다가 다음날 아침 30여명의 유고 관광객들이 같은 요구를 하며 호텔 프런트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바람에 호텔측이 혼이 난 일도 있을 정도다.
유고­중국간의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는 이유는 양국간의 사기업 무역협정이 아직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고의 민간인들은 중국과의 무역허가증을 받을 수 없고 중국인들도 물건을 유고에 팔 수 없는 형편이다.
비록 유고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6천5백달러로 중국의 3백40달러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의류와 소비재에 있어서는 중국상품이 훨씬 저렴하고 품질도 우수하다.
결국 이와 같은 중국의 비교우위는 유고인들의 밀무역 사재기로 해소될 수 밖에 없다는데 「유고인러시」의 근본 원인이 있다.
18달러짜리 실크블라우스가 1백달러,40달러짜리 재킷은 2백달러,2백달러짜리 가죽코트는 1천달러에까지 육박한다.
따라서 유고인 「사업가」들은 자금성·만리장성 등의 관광코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북경에 도착하기 무섭게 시장으로 달려가고 있다.<진세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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