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김치사장님 성공양념은 손맛+특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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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승식 기자

40여년 전 충남 당진군 고대면 고대리에는 입맛이 유난히 까다로운 아이가 있었다. 김장이 잘못되면 겨우내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왜 오늘 김치는 어제보다 맛이 없어요", "올해 김치는 왜 이리 빨리 익었나요". 어머니는 아이의 이런 질문에 답하기 바빴다.

'특허 김치'로 이름난 한성식품 김순자(52.사진) 사장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한성식품은 대상FNF의 '종가집'에 이어 김치시장에서 2위를 달리는 중견 김치업체. 일찍이 김치 제조방식을 표준화해 '미역김치', '미니롤보쌈김치' 등 19종의 김치 특허를 갖고 있다.

어머니에게 '조기교육'을 받은 그의 김치 담그는 실력은 신혼 때부터 소문이 났다. 이를 사업화하겠다고 작정한 것은 1986년. 한 호텔에서 설익은 김치를 내놨다가 손님에게 핀잔을 듣는 모습을 보고 '김치를 만들어 파는 것도 사업이 되겠구나"라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그는 바로 서울 대림동의 문닫은 단무지 공장을 사서 김치 공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일과 대량으로 김치를 만드는 것은 달랐다.

새벽시장에서 떼온 배추는 절이기도 전에 뙤약볕에 시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처음 출고한 김치는 15㎏에 불과했다. 하루 100t에 이르는 요즘 생산량의 6000분의 1에도 못미치는 양이다. 어느 관공서 입찰을 딴 바로 다음날 큰 수해가 나 배추값이 열배 이상 올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물에 잠긴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을 헤매고 다닌 일이 눈에 선하다. 그 때 손재주만으로는 사업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산지 확보와 물류의 중요성을 깨친 것이다. 하지만 김치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거래처는 곧 시내 유명 호텔과 관공서, 학교 등으로 늘었다.

'김치 사먹는 문화'가 확산될 무렵인 93년에 위기가 닥쳤다. 공장부지의 소유주가 땅을 팔아 버린 것이다. 늘어난 주문량에 맞게 공장을 새로 짓자니 자금이 모자라고, 돈에 맞추려니 거래처가 끊길 상황이었다. 백방으로 뛴지 3개월 여만에 출구를 찾았다. 부천의 한 김치 공장이 옮긴다고 해 그 공장을 사들였다. 지금 한성식품 본사가 둥지를 튼 곳이다. 이후 성장가도를 달려 2004년에 매출액이 500억원에 육박했다.

그러나 '기생충 파동'으로 한번 더 몸살을 앓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해 11월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됐다고 발표하면서 한성김치의 충북 진천 공장을 지목했다. 수십차례 언론에 회사이름이 실명으로 공개돼 주문량이 급감했다. 하루 120t에 이르던 출고량이 20t으로 줄었다. 곧 채권단이 들이닥쳤다. "너무 억울하니까 오히려 담담해지더군요." 공장이라도 접수할 기세로 몰려든 채권단은 김 사장의 이런 의연한 태도에 놀랐다. 또 직원들이 정성스럽게 김치를 담그는 모습에 또 한번 주춤했다. 어느 은행장이 "힘 내십시요."라는 문구가 쓰인 리본을 붙여 보낸 화분 하나는 채권단을 설득하는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김 사장은 당시 사업을 접을려고 생각 했지만 '김치 세계화'라는 꿈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학부모들을 공장으로 초청하고,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인증을 따내는 등 오해를 풀려고 사방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자 등을 돌렸던 거래처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는 않았지만 김치 세계화의 꿈은 조금씩 영글고 있다.

한성 김치는 이달 11일 미국 최대 유기농 식품 쇼핑몰인 '홀 푸드 마켓'의 캘리포니아 지역 매장에 선보인다. 자연 발효되면서도 냄새가 덜 나는 특허 김치로 미국 구매담당자를 움직였다. 지난 9월에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모스크바 수출인큐베이터에 입주해 러시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김 사장은 "한성만의 손맛을 개발해 일본에 뺏긴 서구의 김치 시장을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글=임장혁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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