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권력과 영욕 같이한「서울공화국수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내년으로 예정된 서울의 민선시장 자리는 비상한 관심과 기대가 모나진다.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 분야의 중심이며 정보의 집산지이자 1천만인구가 몰린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직접「통치」하는 엄청난 책임과 권력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구도의 변화에 따라서는 차기 대권을 넘볼 가장 큰 프리미엄을 손에 쥘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른바 「서울공화국대통령」고지를 향한 정가의 치열한 각축은 여야 간 지자제협상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이미 시작돼있다. 23대째인 박세직 시장 취임을 계기로 서울시장이란 자리의 위치와 역대 시장들의 공과를 돌아본다.
역대의 서울시장은 집권자의 성향, 그리고 그 시대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함수관계를 맺으며 부심해 왔다.
유달리 격랑이 심했던 우리의 현대사는 전환기마다 다른 유형의 시장을 배출했던 깃이다.
해방이듬해인 46년9월 경성 부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바뀐 이래 지금까지 23대에 걸쳐 모두 21명의 얼굴이 짧게는 두 달에서, 최고 5년까지 그 자리를 거치며 숱한 일화를 남겼다.
초창기 윤보선·이기붕·허정씨 등 거물급 정치인에서 4·19직후엔 헌정사상 유일한 민선시장인 김상돈씨가 등장했고5·16군사쿠데타와 함께 현역육군소강 윤태일씨가「군복집무」를 하기도 했다.

<윤태일씨 군복집무>
윤씨와 함께 14대 김현옥,16대 구자춘, 18대 박영수씨와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현 박세직 시장 등 5명이 군 출신으로 이중 박영수씨는 5·16때 헌병대령예편 후 서울시경·치안국장을 지낸 군·경 출신.
박씨 외에도 치안총수를 지낸 경찰출신시장은 5,6대 김태선,17대 정상천,20대 염진현씨 등 3명이 더 있다.
정통행정관료출신이 양탁직(15대), 김성배(19대), 김용내(21대), 고건(22대)씨 등 4명 뿐인 것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최장수 시장은 2대에 걸쳐 5년10일을 한 김태선씨이지만 부산 피란 시절인 51년6월 임명돼 처음 2년여가 6·25전쟁 중이었고 그 기간 중에도 2대 대통령선거를 위해 한달 간 내무장관을 한 것을 치면 실질적인 최장수 시장은 4년4개월18일을 재임한 양탁식씨를 꼽기도 한다.
다음이 4년3개월18일의 구자춘씨와 염보현(4년2개월15일), 김현옥(4년15일)씨 순.
최단 명으로는 60년5월2일부터 시작, 꼭 60일 만에 의원출마를 위해 사임한 10대 장기영씨다.
불우한 시장으로는 7대 고재봉씨(92)를 들 수 있다.
한전의 전신인 경기전기사장을 거쳐 56년7월부터 1년 반 동안 시장을 지낸 그는 80세 때인 79년 본인의 신병과 외아들과의 사별을 비관, 부인과 함께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현재 서울성내동 손자 집에서 완전히 실명한 채 거동마저 제대로 못하고 시우회(전직 시 직원 모임) 의 생계보조를 받으며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있다.
가장 오점을 남긴 인물로는 재임기간 중 업자로부터 8천만 원의 뇌물을 받고 이권에 개입한 비리와 관련, 88년 검찰에 구속, 수감(징역3년6욀)됐다가 지난해 8·15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염진현씨로 5공 비리 중 한사람으로 남게됐다.
초대시장 김형민 옹은 미 유학 및 항일운동경력을 가진 인텔리로 부윤을 지내던 46년9월 관제개편으로 공식적인 첫 서울시장이 된 뒤 정으로 돼있던 2백80여 개의 일제 식 행정구역을 모두 동으로 바꿔 오늘날 명동·필동·충무로 등의 이름을 있게 한 인물.
김 옹은 현재 서울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며 매달 한번씩 고향인 전북 익산과 경기도 부평의 개척교회 두 곳에 내려가 25년째 설교를 하는 정정하고 건실한 여생을 보내고있다.
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첫 시장은 해위 윤보선 선생(2대·지난해7월 작고).
파란의 경치여정을 겪은 해위의 취임 일성은『쓰레기를 청소하라』였다.

<허정씨 청렴 강직>
극심한 식량난과 높은 문맹률, 무질서에 휘말려있던 당시로선 식량배급·공민교육·청소 등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3,4대 이기붕씨(60년 일가족자살)의 시정방향도 해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며 6·25를 맞아 피란 시장의 설움까지 맛봐야했다.
김태선 시장(77년 작고)은 전재복구라는 중책을 맡아「건설제일주의」와「국산품장려」를 외치며 상수도 및 도심구획정리사업, 남·동대문시장 현대화, 남산·북한산 공원조성 등 복구의 기본골격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
8대 허정 시장(우양·작고)은 자유당정권의 시장 중 가장 청렴·강직한 인물로 꼽힌다.
당시「빽」을 믿고 세금을 안 내던 수많은 납세자들에게 과감한 징세과 재산압류조치를 가해 직원봉급조차 못 주던 시의 적자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았으며 시장 실 문을 발로 차고 드나들기 예사인 기고만장의 모 야당의원을 「깡패 같은 놈」이란호통과 함께 수위를 불러 끌어내 본때를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자유당 시장인 9대 임흥순씨(71년 작고)는 전 직원에게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도시락시장」으로 불렸는데 체중1백kg이 넘는 역도선수출신 직원의 진정을 받고 그에게만 외식을 허락했다는 일화가 있다.
4·19이후 장면 내각 하에서 치러진 첫 시장선거에서 4선의 야당의원관록으로 자유당정권과 투쟁해온 김상돈씨(86년 작고)가 첫 민선시장이 됐다.
카이제르 수염으로 유명한 그는 취임식을 이례적으로 청사뒷마당에서 갖고『서울시는 복마전』이라 공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으며 계장 급 이상 간부전원에게 사표를 강권하는 등 쇄신을 시도했으나 5·16으로 소신을 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6개월만에 쫓겨나 72년 미국이민 길에 오른다.
지자제의 역량을 시험해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혁명주체」인 군인시장 윤태일씨(82년 작고)는 민생고해결·부정부패일소로 규정되는 군사정부의 시책을 강행하면서 당시 시 직원 중 병역기피자를 모조리 면직시킨 군인다움(?)으로 유명하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항상 중절모를 쓰고 온화한 성품을 지녀「영국신사」로 불린 13대 동산 윤치영씨(93·현시지회회장)에 이어 「불도저시장」김현옥씨(64·현 경남 양산군 장안중 교장)가 등장했다.
닥치는 대로 파헤치고 부수고 짓고 메우는 추진력은 가위「혁명적」이어서 여의도개발과 고가도로·21개의 지하도, 수많은 산 동네아파트 건립 등 엄청난 일들을 잘도 해치워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급속히 바뀌었다.
66년4월 40세라는 최연소로 시장발령을 받고 취임식을 하러 가는 도중『8·15까지 광화문지하도를 뚫으라』고 지시사항1호를 발표한데 이어 첫날여론이 나쁜 국·과장 14명을 대기 발령시키며 돌풍을 예고했다.
건설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하며 일을 제대로 못한 부하직원은 사정없이 걷어차고 지휘봉으로 때렸으며, 구청연도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안에서 무선전화로 『×구청 아무개는 무능하니 직위 해제 시키라』고 지시하면 시 정사에 도착할 때에는 이미 징계발표가 나 있어야했다.
급속 개발은 와우아파트붕괴와 같은 부실을 초래했지만 결국오늘날 거대한 서울의 기틀이 됐고 개발수익을 또 다른 개발에 재투자하는 이른바「시정의 경영 화」를 처음으로 도입, 일부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 시장은 역대시장 중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인정되고있다.

<「황야 무법자」별호>
후임 양탁정씨(67)는 「휴식없는 노력형」으로 정평이 났었다. 재임 중 최초로 지하철(1호선)을 건설한 그는 김현옥씨가 마구잡이로 벌여놓은 온갖 사업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다 74년8월15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의 문책으로 해임.
구자춘씨(59)도「제2의 불도저」「황야의 무법자」로 불린 돌진형으로 을지로·청계로·종로·용산로 등의 대폭확장, 잇따른 한강교량설치 등 선 굵은 정책을 폈다.
경찰출신의 정상간씨(60)도 양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 전임 구 시장이 벌여놓은 시책이나 사업을 마무리하는 역을 했다. 5공 줄범과 함께 부임한 박영수 시장(64)은 과묵하면서도 집념이 강한 외유내강 스타일로 스위스 바덴바덴의 IOC총회에서 서울올림픽개최가 확정되는 순간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는 모습으로 인상지어진다.
본격「5공 시장」은 그 뒤를 이은 김성배·염보현 두 사람으로 주사로부터 공무원을 시작한 김씨는 부드러운 성품의 정통관료며 전기환씨의 노량진수산시장 강제인수사건과 관련, 검찰에서 참고인조사를 받으며 전씨의 압력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보살」「집사」「전경환 똘마니」「청지기」등으로 불린 염 시장은 강력한 추진력과 열의로 행정가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평이지만 전씨 가문의 후견인 노릇에 워낙 충실해 5공의몰락과 함께 하루아침에 지탄을 받게된 신세.
염 시장 구속의 충격은 소신형 전문행정가 고건씨를 등장시켰다.
전남지사와 12대의원, 교통·농림수산·내무장관을 두루 거치며「깨끗한 관리」라는 정평을 들어온 그는 2년 동안 택지개발사업·지하철2기 건설·남산복원·도시고속화도로 건설 등 굵직한 사업들을 무리 없이 추진했으며 민생관련 업무도 흠 없이 펼치고 구랍27일 퇴임했다.
지자제 하에서 서울시장의 역할과 위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정부시책을 실행에서 옮기는 종래의 단순행정위주에서 정치·외교능력을 갖춘 정치가로 전환돼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