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경 수기에 담긴 속마음 "우린 적이 아닌데 … 그저 맞고만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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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시위 현장 경험을 주제로 한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마포경찰서 소속 황호진 일경. [신인섭 기자]

"해가 뜨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위대의 공격이 하루종일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그저 맞고만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 때려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울 마포경찰서 소속 황호진(22) 일경은 올 6월 마포대교의 시각장애인 농성 현장에 차출됐다. 황 일경은 "앞으로는 시위대가 공격을 해오고, 뒤로는 차들이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고참의 호통 소리가 들린다. 어디에도 나의 편은 없다. 시위대 중 한 명이 우리에게 시너를 뿌리며 라이터로 위협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적었다.

올 3월 의무경찰로 입대한 황 일경은 "우리는 그들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바와는 전혀 상관없는 청년들일 뿐이다"라고 호소했다. 그러곤 물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온갖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근무를 했는가." 이에 스스로 답했다. "아무도 몰라줘도 좋다. 치안과 평화를 위한 우리의 숭고한 임무는 영원히 계속된다"고.

경찰청은 집회.시위 경험을 주제로 한 전.의경과 가족의 수기(手記) 10편을 엮은 '전.의경 그들의 삶'(사진(上))이란 책자를 1일 공개했다. 황 일경은 278편의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황 일경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올 3월 의무경찰로 입대하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집회.시위가 이처럼 잦고 과격한지 몰랐다"고 털어놨다.

책에서 전.의경들은 "시위대와 우리의 관계는 형이며, 누나며, 아버지며, 어머니들이다. 이제 '당신의 아들이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라고 합심해 외칠 때"(대전 동부방순대 이종민 일경), "돌고 돌아도 시위대와 경찰은 결국 같은 존재라는 '뫼비우스의 띠'의 참뜻을 이해해야 폭력이 사라질 것"(울산경찰청 기동대 김경일 일경)이라며 폭력 시위 중단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 "나는 멍청한 부모"=서울 종암경찰서 소속 김대성(20) 상경의 아버지 김진혁(57)씨는 자신을 "멍청하게도 아들을 의경에 보낸 부모"라는 소개로 수기를 시작했다. 현직 경찰관인 친구가 "군인은 전쟁이 터져야 싸우지만 의경은 매일 싸움터에 간다"며 말렸다고도 했다. 그러나 시민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 마음에 들어 김씨가 아들에게 의경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경기도 안양시에서 공기업에 다니는 김씨는 "의경도 시위 현장에 나가는 줄 정말 몰랐다"며 "미리 알았더라면 육군으로 보내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는 게 더 마음 편했을 것"이라고 썼다.

김씨는 아들 김 상경이 지난해 12월 종암서에 배치된 뒤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집회 장면을 언론에서 볼 때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다"고 적었다. "아들에게서 '경찰은 공격을 못하고 방어만 하라고 늘 훈련받았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왜 시위대가 경찰을 때리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도 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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