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만 바라본 한국 정부, 안보 그림 놓쳐 '라인 사태'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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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라인야후 사태가 갈수록 '한·일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권은 급진전한 한·일 관계에 역행하는 일본에 치밀하게 대응하는 대신 반일 감정을 자극하기에만 바쁜 모양새다. 일본 정부의 선 넘은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별 기업의 경영권 방어 문제로 인식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정부의 안일함이 이번 사태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데자와 다케시 일본 라인야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데자와 다케시 일본 라인야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개입 자제"만 반복한 정부

일본 민·관의 합동 공세는 지난해 11월 라인 고객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본격화했다. 일본 총무성은 사고 이후 지난 3월과 4월 두 차례 행정지도를 통해 "네이버와의 자본 관계를 재검토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때까지도 한국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이번 사태가 한국 기업이 독자적인 원천 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플랫폼을 통째로 넘기는 안보 이슈에 해당한다는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단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의 첫 유감 표명은 일본의 두 번째 행정지도로부터 20일 뒤인 지난 10일에야 나왔다. "일본의 행정지도가 지분 매각 압박으로 '인식'되는 점에 유감"(강도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이라면서다. 일본이 실제 압박한 건 없지만 여론의 인식이 그러하니 유감이란 취지다. 그러면서 "강력 대응"을 시사했지만, 이 또한 "차별적이고 부당한 조치가 있을 경우"를 전제로 했다.

별도의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정부 내에선 "네이버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진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기조가 여전하다. 전문가들의 상황 판단과는 딴판이다. 전문가들은 "설사 네이버가 지분을 팔고 라인 야후에서 손을 떼는 게 남는 장사라고 하더라도 기업의 자율적인 결정이 아닌 일본 정부의 행정지도를 따르는 형태로 진행되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한다.

"이번 사태가 윤석열 정부의 최대 외교 성과로 꼽히는 한·일 관계 개선에 누가 될까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 1월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에 경제안보를 담당하는 3차장실이 신설됐는 데도 이번 사태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다.

강도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은 1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라인야후 사태와 관련해 "정부는 일본의 행정지도에 지분을 매각하라는 표현이 없다고 확인했지만 우리 기업에는 지분매각 압박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강도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은 1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라인야후 사태와 관련해 "정부는 일본의 행정지도에 지분을 매각하라는 표현이 없다고 확인했지만 우리 기업에는 지분매각 압박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일본이 뒤통수 친 격" 

이런 흐름은 최근 한·일간 움직임과 동떨어져 있다. 양국은 지난해부터 고위급 협의체를 되살리며 경제 분야에서 빠르게 밀착해왔다. 재계에선 '경제동맹'이란 말까지 공공연히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네이버의 지분 매각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 정부가 '반시장적 조치'라는 뒷말을 낳을만한 개입을 굳이 시도해야 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일본 정부는 "경영권을 노린 게 아니다"란 입장을 내놨지만 "결국 총무성의 행정지도 결과가 네이버의 경영권 박탈을 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일본 내에서 9600만명이 사용하는 '국민 메신저'의 경영권을 한국 기업의 손에는 둘 수는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것 아니냐"는 관점에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이는 "일본이 과연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보고 있느냐"는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내각은 외국의 개입으로부터 국가 기간 사업의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자율성'을 경제안보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민·관이 일사불란하게 외국 기업을 몰아내는 모양새는 우방국을 대하는 자세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난해 8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등 한·미·일 차원의 협력 노력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은 "결국엔 양국 간 신뢰의 문제"라며 "한국을 충분히 믿지 못하고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니 사실상 네이버에 지분을 정리하고 나가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 차원에서 '일본은 한·일 관계 현주소를 진정 이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냐'고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와 관련해 "저와 기시다 총리는 서로 충분히 신뢰한다"며 "인내할 것은 인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칫 과거사 문제에 이어 한국 기업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도 '한국이 일방적으로 인내해야 하느냐'는 반감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선 이달 말 서울에서 4년여 만에 재개될 것으로 보이는 한·일·중 정상회의가 파행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1년 만에 방한하는 기시다 총리와 윤 대통령간 양자 회담을 라인야후 사태가 잠식할 수 있단 것이다.

또 죽창가 부르는 정치권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정치권 공방도 문제다. 당장 야당에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프레임을 꺼내 들었다. 이는 라인야후에 행정지도를 내린 총무성을 지휘하는 마쓰모토 다케아키(松本剛明) 총무상의 가계를 문제삼은 주장이다. 마쓰모토 총무상은 이토의 외고손자다. 하지만 마쓰모토 총무상에 대해선 "한·일 의원연맹 소속으로 과거 외무상(2011년 민주당 정권), 중의원 운영위원장 시절 양국 협력에 관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내용. 페이스북 캡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내용. 페이스북 캡처.

전문가들은 "난데없이 후손 논란을 끌고 오는 건 반일 감정만 선동할 뿐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죽창가'를 불렀던 것과 같은 패턴"이란 우려도 나온다.

여당에서도 "일본의 네이버 축출 시도", "적성국에나 할 조치" 등의 발언이 나왔다. 이와 관련,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과 교수는 "신중하고 실질적인 외교가 최선인 상황에서 당장 국민의 환호를 얻기 위한 언행만 이어지고 있다"며 "정치권의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라인야후는 오는 7월 1일까지 보안사고 방지책을 비롯해 총무성이 내린 행정지도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 최근 라인야후의 이사진은 전원 일본인으로 교체된 상황이다. 네이버가 지분 매각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전문가 사이에선 "네이버가 지분 정리를 결정하고 나면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더욱 줄어든다"며 "이제라도 협상을 측면 지원하는 등 부당한 이권 침해를 막기 위한 고위급 물밑 접촉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기업이 일종의 보호무역 장벽의 된서리를 맞았는데 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는 건 너무 안일한 것"이라며 "네이버가 그간 라인에 쏟은 투자 비용을 충분히 회수할 수 있도록 일본의 차별 조치에 항의하는 건 물론, 우리도 일본 기업을 상대로 상응하는 조처에 나설 수 있다고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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