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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걸면 "피싱이잖아"...이런데도 진짜 김민수 검사가 밝힌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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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권영만 경인방송 회장이 중국동포 행세를 하며 사기를 쳤다고 합니다. 사실이 맞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김민수 검사(33‧변호사시험 9회) 사무실에 이런 진정서가 접수된 건 석 달 전인 1월 중순이었다. 김 검사는 28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처음엔 언론사 회장이 신분 위조 사기꾼이라니 믿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사무실에는 이런 진정서가 매달 20여건이 쌓인다. “사건이 안 되는 게 다반사지만 ‘얼마나 억울하면 진정을 했을까’ 일일이 확인해 답을 주는 것도 검사가 할 일”이라고 파고든 게 주효했다. 김 검사는 지난 9일 권 회장을 중국 동포로 신분을 위장해 4억원의 분양 사기를 벌인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김민수 검사가 지난해 8월 검사 임명장을 받은 모습. 사진 김민수 검사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김민수 검사가 지난해 8월 검사 임명장을 받은 모습. 사진 김민수 검사

‘증거 없는 진정서’ 단서로 지역 언론사 회장 구속 

사실 진정서엔 권 회장과 A씨가 동일인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김 검사는 일단 중국동포 A씨 이름으로 피의자가 입건된 500여개의 사건을 검색했고, 권 회장과 비슷한 연배의 A씨가 저지른 사기 사건 3개를 찾아냈다. 이 중 2010년에 발생한 사건이 눈에 띄었다. 기록에 따르면 A씨는 그해 8월 한국에 입국해 ‘현대도시개발’이란 법인 대표이사로 활동했는데, 이때 주상복합건물 분양 사기를 저지른 정황이 포착됐다. 김 검사는 “입국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중국동포가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수상했다”고 설명했다.

수사를 진행하려면 물증이 필요했다. 이때 법무연수원 시절 감정 교육이 해결의 단초가 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권 회장과 A씨의 사진을 비교해 동일인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의뢰했다. 과거 사건 자료에 있던 A씨의 여권사진이 오래되고 희미해 정밀 감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난관에 부딪히나 했는데 지난달 6일에야 국과수로부터 권 회장과 A씨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회신이 왔다. 권회장이 A씨가 맞다면 사건의 공소시효는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민수 검사가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사기 사건 증거물과 중국 동포 위장 여권(오른쪽). 사진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가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사기 사건 증거물과 중국 동포 위장 여권(오른쪽). 사진 서울중앙지검

“서울중앙 김민수 검사”에 “보이스피싱 아니냐” 전화 끊기도

그날부터 김 검사는 휴일을 반납했다. 권 회장이 A씨라는 확증을 찾기 위해 대면과 전화로 사기 피해자 등 관계자 16명을 접촉했다. 새벽 2시 퇴근은 일상이었다. 같은 기간 다른 100여건의 담당 사건을 함께 처리해야 했다. ‘김민수’라는 이름 탓에 피해자가 보이스피싱으로 의심해 통화를 거절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가 보이스피싱의 대명사인데 불쑥 전화해 13년 전 사건 이야기를 하니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A씨를 만난 사람들에게 ‘권 회장과 A씨가 동일인물인 것 같다’는 진술을 여럿 확보했다. 이어 법원의 영장을 받아 권 회장의 주거지와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고 권 회장을 체포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권 회장 집에서 중국동포 A씨 명의의 여권 등을 증거물로 제시해 자백을 받았다. 지난해 임관 이후 김 검사가 해결한 스무번째 사건이었다.

김민수 검사가 사무실에서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모습. 김 검사는 “‘검사가 한 시간 더 일하면 억울한 사람이 한 명 더 줄어든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진 김민수 검사

김민수 검사가 사무실에서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모습. 김 검사는 “‘검사가 한 시간 더 일하면 억울한 사람이 한 명 더 줄어든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진 김민수 검사

“검사 되고 싶어 미국 시민권도 포기”

김 검사는 “사기꾼이 이제 처벌을 받는 거냐고 묻던 피해자의 들뜬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며 “검사가 되길 잘한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그는 로스쿨 재학 시절 검찰 실무 반장을 맡을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고 한다. ‘좌고우면할 것 없이 정의만 좇으면 된다. 검사가 1시간 더 일하면 억울한 사람이 1명 더 줄어든다’는 교수님의 말이 그를 공직으로 이끌었다. 검사가 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군법무관으로 병역도 마쳤다.

김 검사는 앞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검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검사는 갈등을 다루는 직업이라 모두의 마음에 드는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맘에 들지는 않더라도 설득력 있는 판단이라고 생각이 들도록 매 순간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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