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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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오랜 시간 유럽의 변방으로 치부돼 온 아시아. '서구화'가 현대화와 동의어로 쓰였던 아시아 지역의 현대 미술은 과연 서구의 그것과 어떻게 차별화될까.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은 일본의 후쿠오카(福岡)를 한번 찾아볼 일이다.

17세기부터 항구 도시, 교역의 도시로 잘 알려진 이 곳엔 1999년 3월에 설립된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이 있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이 곳에 소장된 1천2백여점의 미술품은 모두 아시아 작가들의 것이다. 전 세계의 미술관 중에서 아시아의 현대 미술에 특화된 곳은 여기가 최초다.

근대 이후 해바라기처럼 서구의 스타일을 동경했던 일본이 90년대 들어 아시아적 가치와 입맛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탄생한 기념비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야스나가 고이치(安永幸一) 관장은 "미술관 건립은 예부터 일본에서 아시아 문화의 첫째 수용지였던 후쿠오카의 위상을 재확립하는 의미가 있다"면서 "컬렉션의 원칙도 서구의 가치나 시각과 구별되는, 아시아인의 독창적인 예술혼이 발휘된 작품들만 고르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말처럼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구석구석을 돌다 보면 뭐라 표현하긴 힘들어도 한눈에 아시아적 정체성을 알아챌 수 있는 작품들과 마주치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추상화가인 그레고리우스 시달타가 나무와 아크릴, 가죽을 이용해 만든 '우는 여신상(1977년작)'만 봐도 그렇다.

충분히 모던한 여신상이지만 얼굴과 손 모양은 인도네시아 전통 인형의 장식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거기다 여신의 발 밑에 피어오른 불길은 외세의 영향을, 여신의 눈물은 외세에 밀려 사라져가는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한국 작가 중 김환기.김창열.조덕현 등과 함께 이 미술관에 컬렉션된 여성 작가 윤석남의 '족보'(1993년작)도 눈에 띈다. 대형 족보를 배경으로 목 매달아 죽은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작가는 족보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짓눌린 그 옛날 여인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요즘 한국 여성의 현실은 어떠하냐고 넌지시 묻고 있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중국 작가 슈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한 프로젝트 '당신의 이름은?'(1999년작)을 통해 영어 알파벳과 한자의 만남을 시도한다.

관람객이 영어 알파벳으로 자신의 이름을 입력하면 한자체로 재구성된 묘한 문자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다. 영락없이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별 알파벳의 절묘한 조합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곤 누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의 '아시아적' 예술에 대한 관심은 이 같은 컬렉션의 면면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미술관 측은 3년마다 트리에날레를 개최해 젊은 아시아 예술가들의 작품 제작활동을 지원하고, 그 결과물을 미술관에 전시토록 한다. 미술을 통해 아시아의 화합과 소통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다.

99년 개최된 1회 트리에날레 때 필리핀 작가 알프레도 아퀼리잔이 출품한 '존재와 부재'는 트리에날레의 취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이 곳에 체류하는 동안 후쿠오카 시민 5천여명으로부터 각자가 쓰던 칫솔을 수집해 대형 유리상자에 담아냄으로써 독특한 설치 미술을 탄생시켰다.

'후쿠오카와 아시아 사이의 간극을 좁혔다'는 평가와 함께 미술관 한편에 전시 중인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가장 아시아적인 예술이 가장 현대적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후쿠오카=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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