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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날 몰라봐"...'철의여인' 각본가가 쓴 각본 없는 극복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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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시나리오 작가 아비 모건이 펴낸 책의 번역본 제목은 『각본 없음』. 각본을 쓰는 게 업인 그의 삶엔 각본이 없다. 사진 현암사 제공

시나리오 작가 아비 모건이 펴낸 책의 번역본 제목은 『각본 없음』. 각본을 쓰는 게 업인 그의 삶엔 각본이 없다. 사진 현암사 제공

슬픔엔 예고편이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작가 아비 모건(56) 이야기다.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로 탄탄한 커리어를 즐기며, 사랑하는 남자와 두 아이를 기르던 모건은 어느 날, 귀가 후 화장실에 쓰러진 파트너를 발견한다. 혼인신고는 안 했지만 사실상 남편인 그 남자. 의식은 회복했으나 기억은 부분적으로만 되찾았다. 많은 이를 기억하지 못했고, 모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때론 적개심까지 보이기도 했다. 압도적 슬픔 속의 모건은 글쓰기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 결과물이 최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각본 없음』(현암사)이다.

모건은 마거릿 대처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부터 '셰임' '서프러제트' 등, 예술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왔다. 영화 각본으로 일가를 이룬 그의 삶은 정작 각본이 없는 영화와 같았다는 뜻이 번역본의 제목에 담겨있다. 원제는 '이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로 지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슬픔에 침잠하는 대신, 병원을 가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을 하고 집수리를 하는 일상을 담담하게 팩트를 기반으로 기록한다. 슬픔이 닥쳐도 일상의 삶은 계속된다는 그의 메시지는 담담해서 더 슬프다. 모건을 이메일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슬픔을 슬픔으로 그리지 않은 게 인상적이다.  
"극작가인 나는 뭔가를 표출하고 분출(outpouring)하는 데 익숙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는 절제(restraint)를 원했다. 혼란 속에서 일종의 균형을 잡고 싶었다. 책을 쓴 시기가 팬데믹이었던 탓도 있다. 내 사랑인 제이콥에게 벌어진 일, 내가 그와 더이상 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외려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했다. '너'라고 부르던 제이콥을 '그'라고 (책에) 쓰면서, 우리를 더 깊게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신경 쓰는 점은.  
"자료 조사가 핵심이고,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협업이다. 함께 오래 일해온 동료들이 있음은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작가인 내가 펜을 놓아야 (촬영이) 시작되는데, 이 책은 내가 그 한가운데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글을 쓰며 혼자가 되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써낸다는 것은 해방감을 줬다."  

아비 모건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철의 여인' 포스터.

아비 모건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셰임' 포스터.
이렇게까지 힘든 삶,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삶은 때론 힘들다. 감정의 회복탄력성(emotional resilience)가 중요한 까닭이다. 내겐 글쓰기가 구원이었다. 글을 쓰며 나는 스스로의 약점을 고백하고, 세상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우린 때로 목적지에 집중하느라 여행의 과정을 놓칠 때가 있다. 우리의 인생은 곧 우리의 여정이다. 독자에게 어떤 일이 닥쳐도 겁 먹지 말라고 응원의 손을 내밀고 싶다. 최악이 와도 용기 내 직면하고, 우리에게 그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 인생은 동화책이 아니지만, 동화책에조차도 악마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길은 숨겨져 있을 때가 많지 않나. 희망과 회복을 위해 나아가자."  
한국인의 불행지수는 특히 높고 출생률은 낮다.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을 우리는 소셜미디어에 낭비하고 있다. 완벽해 보이는 소셜미디어에서의 인생은 모두 큐레이팅 된 것이다. 나 역시 욕심과 교만의 약점을 가진 인간이며,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려 한다. 비교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고 받는 것이다."  
한국은 자살률도 높은데.  
"나 역시 최악의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라고 생각한 적, 있었다. 그때 가족에게 전화를 했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혼자 가라앉지 말고, 누군가라도 좋으니 얘기할 사람을 찾길 바란다."  
아비 모건의 책 표지.

아비 모건의 책 표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고통은 계속 올 텐데.  
"무지개를 보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글쎄, 내가 깨달은 것은 이거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우리는 그저 삶의 계속되는 순환의 일부 일뿐이라는 것. 제이콥을 보며 삶의 유한함을 느끼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일상에서 겪으며 느낀 무섭지만 단순한 진실이다. 다른 고통이 또 오겠지. 하지만 미리 걱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사랑과 자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고 싶다."  
지금 제이콥과 아이들은 어떤지 물어봐도 되나.  
"많이 좋아졌다. 제이콥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삶을 포용하고 살아내고 있다. 아이들도 잘 성장해주고 있고, 아빠의 상태를 보며 자라서인지 과학과 생물학에 관심이 깊다. 아이들을 보며 회복과 재생에 대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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