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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ook] 그래도…‘내 일’을 해야 내일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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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 오늘 운명의 투표일 - 장덕진 교수가 본 4·10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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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혐오의 선거다. 전·현직 대통령을 혐오하고, 정치인을 혐오하고, 역사적 인물들을 혐오하고, 지역을 혐오하고, 여성을 혐오하고, 혐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혐오한다. 혐오하니까 심판하겠다고 한다.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하고 야당을 심판하겠다고 한다. 혐오의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반응은 보통 둘로 나뉜다. 그들의 행태에 염증을 내고 정치 무관심층으로 돌아서 버리는 것이 하나고, 그들의 혐오에 동참해 분풀이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역대 가장 낮은 총선 투표율은 2008년 18대 총선의 46.1%였다. 유권자 두 명 중 한 명도 투표하지 않았으니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 이후 투표율은 계속 올라서 2012년 19대 총선 54.2%, 2016년 20대 총선 58.0%, 2020년 21대 총선 66.2%를 기록했고, 이번에는 70% 벽을 넘길 수 있을지가 관심사가 됐다. 투표율이 높아진 데에는 이 기간 동안 사전투표 제도가 정착됐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상은 투표율은 혐오의 정치와 동반해 상승했다는 점이다. 유권자의 두 가지 반응 중 두 번째 것이 대세가 돼 가고 있다. 이제 유권자 중 상당수는 적이라고 규정한 정치집단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 혹은 그들이 다수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투표한다. 서로를 심판하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 우리 편의 흠결이나 정책의 차이 같은 건 나중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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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치라는 31.28%의 사전투표율은 그래서 안도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낸다. 한편으로 민주주의란 원래 정치적 균열을 만들고 반목하는 것이다. 반목하는 정파 중 어느 쪽의 의견이 더 많은 지지를 얻었는지 선거를 통해 확인한다. 시민들이 투표 참여 자체를 거부하는 체념의 사회보다는 의견이 다르더라도 너도나도 참여하는 시끌벅적 활기찬 사회가 낫다. 그러나 이 높은 사전투표율의 상당 부분이 혐오의 정치에 동승한 심판의 투표일지 모른다는 한쪽의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정권 심판이든, 야당 심판이든 말이다. 심판은 결코 시대정신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상대와 손잡지 않고 세상 바꿀 방법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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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어려움의 본질에 무엇이 있는지를 간파하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를 강구하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미래상이 무엇인지를 설계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적과 타협해야 한다면 기꺼이 타협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그래서 아직 투표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호소한다. 투표하자. 투표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자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경고는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특히 한국처럼 인구·안보·경제적 격변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양당 지지층이 집결한 상황에서 가장 많은 부동층으로 막판 변수가 된 젊은 세대의 경우를 보자. 이들 젊은 부동층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정하고 투표에 참여할지 아니면 정치 무관심층으로 돌아서버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이 무엇이든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그들에게 긍정적·부정적 유산을 동시에 남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우리의 선택에 좌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인구 위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고, 수많은 전문가가 경고하고 대책을 촉구해 왔다. 하지만 법을 만들고 정부를 책임졌던 사람들은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만들지 못하다가 지금의 상황을 맞았다. 그사이에 정권 교체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본인들이 겪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기야 예상했던 대로 1~2년 전부터 급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고령화는 향후 젊은 세대에게 엄청난 세금 부담을 안겨줄 것이다. 앞으로 4년 동안 국회에서 만들어질 법들이 바로 이런 내용을 담게 될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이의 미래를 규정할 법을 만들어 놓고 사라질 것이다. 스스로가 결정한 미래이기를 바라는 이유다. 지금과 같은 혐오의 선거에서, 투표하지 않으면 혐오하는 사람들의 결정권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선거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갈리고 찢어진 이 난국에서 각 당은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정치지도자라 부르고 기리는 인물들은 어떤 난세에도 정치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열어두었던 사람들이다. 선거에 출마하며 그들의 묘소에 가서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복원의 신념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적과 손잡는 것이고, 승리한 순간 겸손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상대와 손잡지 않고 세상을 바꿀 방법은 없다. 갈라져서 적대하던 시민들도 혐오가 참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곰곰이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일상적 행동의 준칙(mores)이다. 다수결 다음 단계의 진짜 민주주의가 있고, 우리는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

장덕진 교수·서울대학교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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