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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부끄러움 없는 날 우리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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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성국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눈앞의 임산부를 어떻게 못 보지.’ 지난달 출입처인 한 IT기업의 주주총회장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탔다. 정자역까지 가려면 한 번 갈아타고 21개 역을 지나야 했다. 함께 지하철을 탄 20대 여성이 비어있는 임산부석에 잽싸게 앉아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 같았고 임산부는 아닌 듯했다. 다음 역에서 임산부 배지를 건, 배가 나온 임산부가 그 앞에 섰다. 임산부석에 앉은 이는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헛기침했지만 소용없었다. 5~6개 역을 지난 뒤 그는 임산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죄송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내렸다. “임산부 배지를 달아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모른 척해 힘들었다”는 출산한 이들의 말이 떠올랐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등의 시를 쓴 김광규 시인이 2018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등의 시를 쓴 김광규 시인이 2018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사역에서 내려 신분당선 열차를 탔다. 임산부석이 없는 칸이었다. 자리에 앉아 뉴스를 보다 보니 종착지 정자역에 가까워졌다. 내 앞에는 중년 여성 두 명이 서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 앉을 줄 알았던 아주머니는 누군가에게 손짓하며 말한다. “아가씨, 여기 앉아요.” 서너 걸음을 걸어온 임산부는 “고맙다”며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보였을 텐데 왜 못 봤을까. 난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게 아니잖아. 아니 3호선 임산부석에 앉아있던 이에게 내가 혀를 찰 자격이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지하철 문이 열리기까지 그 몇 초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진 걸까. 뒤통수가 뜨거웠다.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누가 묻는듯했다.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묻는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외에도 ‘부끄러운 계산’ ‘부끄러움 없는 날’ 등에서 김광규 시인은 부끄러움을 다뤘다. 김 시인은 등단 40주년을 맞은 2016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인간의 자의식은 부끄러움에서 시작되는 건데,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며 “용기 같은 덕목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게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시인의 말이 무색하게 이번 총선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은 정치인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입시 비리, 대출과 증여, 막말 문제까지. 모두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 아울러 각 정당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날 선 말의 향연은 선거를 부끄러움의 축제로 만든다. 상대 당을 ‘쓰레기’나 ‘깡패’로 부른다거나 반대편 지지자를 혐오하는 ‘2찍’, 재혼 가정에 상처를 주는 ‘때리는 의붓아버지’란 말 등이 그렇다. 또 다른 당의 검찰 출신 비례 1번 후보는 배우자의 40억원 전관예우 논란에 대해 “160억원은 벌었어야 한다”고 응수했다. 시 ‘부끄러움 없는 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부끄러운 데 가리고 이 세상으로/ 쫓겨난 그때부터 왜 곳곳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라는 말/ 욕설로 쓰이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바로 부끄러움 없는 날/ 우리는 가장 부끄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