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칼럼

대통령의 고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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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의 지론이다. 때로는 연회나 마작판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독은 오만에 대한 반성과 대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근신을 낳고, 인간의 실존을 깨닫게 하며, 도덕적 용기가 뒷받침하는 결단력을 낳는다"고 그는 말한다. (나카소네 회고록, '정치와 인생' 중에서)

국회의원 시절, 그는 도쿄에서 좀 떨어진 시골에 농가 한 채를 구입해 별장으로 개조했다. '히노데(日の出) 산장'이다. 나카소네는 각료와 총리를 지내면서 곤경에 부딪히거나,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혼자 이 산장을 찾곤 했다. 지난주 도쿄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며 물었더니 요즘도 가끔 그곳에 들러 좌선(坐禪)을 한다고 했다.

나카소네는 2003년 은퇴하기 전까지 56년간 정치에 몸담았다. 스물여덟의 나이에 국회의원(중의원)에 당선된 이래 무려 20선을 기록했다. 당과 내각의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총리대신으로 5년간 '불침항모(不沈航母)' 일본호의 운항을 책임지기도 했다.

그는 정치는 순정과 헌신, 질투와 원한이라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바다를 헤엄쳐 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의 희로.애락.이상.순애.모략.배반.원한이 엮어내는 일대 만다라(曼茶羅)가 정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에게는 슬기도 필요하지만, '처세의 지혜' 없이는 '정치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충고한다.

그래서 정치를 하려면 직정(直情)적이고, 단세포적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데올로기나 명분에 사로잡혀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정치인의 자질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의가 어떠니, 사리가 어떠니 외쳐도 결과적으로 일하지 않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가 대학 강의나 교회 설교와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세의 지혜'는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에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나카소네는 말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정치인은 일본어를 하는데 일본 정치인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은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해 약 1년간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회고했다. 행정관리청 장관 시절, NHK의 한국어 강좌 프로그램을 통해 학습하고, 서울특파원 출신 일본 언론사 기자로부터 배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1983년 전후(戰後)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청와대 만찬사의 3분의 1을 한국어로 했다. 또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의 2차 연회에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한국어로 부르기도 했다. 나름대로 '성의의 표시'였다는 것이다. 그는 "외교란 개인적 친분 관계다. 현대 세계는 개인 친분에 의한 정상 간의 신뢰와 리더십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의 전설 같은 '론-야스 관계'도 외교적 처세의 산물이었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무상한 것이 권력이고, 임기 말 권력 누수가 오죽했으면 그런 말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헌정질서의 담지자인 대통령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남은 1년3개월 동안 무사히 '정치의 바다'를 건너 주는 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소임이다.

이미 고독하다고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고독의 경험을 노 대통령에게 권하고 싶다. 코드가 맞는 비서관과 측근을 모두 물리치고 정말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라는 것이다. 우리 눈으로 보면 보수.우익 정치인일지 몰라도 일본 기준으로 나카소네는 확실히 성공한 정치인이다. 그가 쓴 회고록을 읽으며 정치인에게 필요한 참다운 '처세의 지혜'가 무엇인지 헤아려 봤으면 좋겠다. 지금 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한 사색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