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통계조작과 정치감사 사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이명박(MB) 정부 막판인 2012년 일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선 양극화 책임 공방이 벌어졌다. 분배 지표인 지니계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통계청은 기존 가계동향조사의 지니계수를 보완하기 위해 가계금융복지조사(가금복)에 기반한 새 지니계수를 만들었다. 가계동향조사의 표본은 8700여 가구에 불과했지만 가금복 표본은 2만 가구였다. 가계동향조사는 고소득자의 소득이 실제보다 적게 반영되는 데다 무응답률이 높았다. 가금복은 표본수를 크게 늘려 고소득자 소득 반영 수준을 높일 수 있다. MB 정부는 임기 내내 지니계수가 호전되고 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위권이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가금복의 새 지니계수로 보니 OECD 하위권이었다.

MB 정부 때도 지니계수 외압 논란
정책 조바심이 달콤한 통계 찾아
통계의 독립성 높이는 계기 돼야

통계청은 연초에 주요 통계의 연간 보도계획을 발표한다. 가금복의 금융 부분 발표일은 11월 9일로 확정돼 있었다. 하지만 통계는 대통령 선거일(12월 19일)이 지나고 22일 공표됐다. 그것도 새 지니계수는 빠진 채로. 사실상 통계조작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 후 반년이 지나 2013년 6월 한겨레 보도로 세간에 알려졌다. 지니계수 논란은 통계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2013년 7월 김현미 의원이 통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통계를 공표 전에 누설하거나 목적 외 용도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항목이 추가됐다. 김현미 안은 이후 정부 발의안 등과 병합돼 2015년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새 통계법은 통계의 중립성을 명시했고, 외압 행사 금지조항이 들어갔다. 통계청뿐 아니라 통계 작성 기관도 공표 전 누설 금지에 포함됐다. 덕분에 감사원의 지난주 발표에 한국부동산원(옛 한국감정원)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의원 김현미’가 ‘장관 김현미’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감사원의 중간 감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문재인 정부 때 시비가 일었던 집값과 소득·고용 통계에 실제로 청와대와 상급 부처의 외압이 있었다. 실제로 통계치도 달라졌다. 국토교통부는 산하기관인 부동산원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조직과 예산을 다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오죽 심했으면 부동산원 노조가 청와대와 국토부의 외압을 경찰에 제보까지 했을까. 감사원이 발표한 가계소득 통계 관련 청와대 외압은 모두 황수경 통계청장 때다. ‘통계 독립’을 외치던 황 청장은 건너뛰고 청와대와 통계청이 ‘통계 마사지’에 나선 사례도 있었다. 황 청장이 퇴임식 내내 울면서 “통계가 정치적 도구가 돼선 안 된다”고 말한 속사정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그제 재임기간 고용률과 청년고용률이 사상 최고였다며 인용한 보고서는 김유선 전 대통령 직속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작성했다. 그는 지난해 위원회 명의로 『소득주도성장, 끝나지 않은 여정』이라는 무료 전자책을 냈다. 자화자찬이 많지만 5년 단임 정부가 단기간에 정책 성과를 보여주겠다는 강박관념으로 무리수를 뒀다는 내부의 따끔한 지적(원승연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런 조바심이 정책 당국자의 눈을 가리고 달콤한 통계만 찾게 한다.

야당은 정치감사라고 주장한다. 감사 기한을 세 차례나 연장해 1년을 끌었고 직무감찰을 주로 하는 특별조사국까지 투입한 건 이례적이다. 감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중간발표를 한 것도 뒷말이 나온다. 진실은 통계조작과 정치감사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통계청 사람들은 통계의 독립성을 가장 잘 지켰던 정부로 노무현 정부를 꼽는다. 대통령부터 통계는 미리 안 보고 결과만 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후 역사를 보면 보수·진보정부 모두 통계 마사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통령의 선의에만 기댈 일이 아니다. 통계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시스템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