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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이 시대의 위인, 관정 이종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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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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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내가) 10년은 더 살 것 같다고 해. 그러면 우리 장학생이 노벨상 받는 거 볼 수 있지 않겠나.” 4년 전 인터뷰 때 그가 말했다. 경상도 억양의 거침없는 말투가 여전했다. 당시 그의 나이 96세(1923년생)였다. 2014년 첫 인터뷰 이후 가끔 마주할 때마다 그는 건강에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 같아서는 20년은 더 살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노벨상을 애타게 기다렸던 고인
1조7000억 규모 장학재단 조성
“이공계 인재가 부국을 만든다”

그랬던 이종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명예 이사장이 지난 13일 타계했다. 폐렴 증세로 입원해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재단 측 인사는 연하장애로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흡인성 폐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7월 중순의 장학금 수여식에서 학생들에게 “면학에 더욱 정진하라”고 주문했던 그였다. 부고를 접하는 순간 고령자의 내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장례는 삼일장으로 치러졌다. 입원 뒤 고인이 간소한 장례를 당부하며 몇 가지를 주문했는데, 그중 하나가 삼일장이었다고 한다. 유족은 조의금은 물론 조화도 사양한다고 부고를 통해 알렸다. 재단은 고인이 의식이 흐려지기 전에 “관정 장학생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걸 보지 못하고 가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생의 끝을 직감했던 것 같다.

고인은 노벨상 얘기를 수시로 했다. 관정 장학금 중 유학생에게 주는 것은 자연과학·공학 전공자에게 집중된다. 문과 쪽에는 경제학 전공자로 국한된다. “경제학에는 왜 장학금을 줍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이 명쾌했다. “노벨 경제학상이 있잖아.” 이종환교육재단은 2000년 설립 때 노벨상 수상자 육성을 핵심 목적으로 천명했다.

도대체 왜 이토록 노벨상에 애착을 보일까. 장학사업을 좀 더 세련되게 포장해도 될 텐데, 왜 노골적으로 노벨상을 언급할까. 늘 그 이유가 궁금했고, 기회가 생기면 질문을 바꿔가며 물었다. 그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전선으로 끌려갔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인 학도병은 특히 위험한 곳에 배치됐다. 힘없는 나라, 고달픈 백성의 운명을 체험했다. 합성수지(플라스틱) 생필품과 비닐 포장재 제조업으로 돈을 벌고 전선과 송전용 애자를 만들면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일본인이 자주 노벨 과학상을 받는데, 우리가 노벨상을 많이 받아야 진정으로 일본을 넘어서는 나라가 된다. 스위스처럼 작은 나라도 과학과 기술이 뛰어나니 잘산다. 100년을 살며 현대사를 관통한 그는 노벨상 수상을 선진국 증표로 여겼다.

고인이 사재를 내놓아 만든 교육재단의 기금 규모가 약 1조7000억원(평가액 기준)이다. 23년간 1만1500명 이상에게 장학금을 줬다. 그중 약 750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총 장학금 지급액이 2700억원이다. 수혜자 수와 총액 면에서 국내 최대 장학 사업이다.

고인에겐 2남4녀의 자식이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자녀에 대한 유산 문제로 후회한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많이 남겨줘도 잘 지키고 키운다는 보장이 없다. 다들 먹고살 만큼은 해줬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식에게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200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접이 박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경남 의령군 생가 복원 때 관청과의 갈등을 비롯한 몇몇 잡음이 평가에 그림자를 드리운 측면이 있다.

관정(冠廷) 이종환.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더 큰 부를 일군 사람은 많지만 그만큼 사회에 재산을 내놓은 사람은 없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위인이다. 10여 년 전 출간된 고인의 회고록을 다시 읽었다. ‘나라의 발전과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로 많이 몰려야 한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관정 장학생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가 하루빨리 나와 고인이 저세상에서 함께 기뻐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