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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가짜 영웅’은 필요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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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이 발행한 '해조신문' 1908년 3월 8일자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인심결합론'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이 발행한 '해조신문' 1908년 3월 8일자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인심결합론'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주일여 러시아 방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16일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함대를 찾았다. 전략폭격기도 시찰했다. 김정은은 현재 핵추진 잠수함을 개발 중이다. 그가 러시아 핵잠수함 사령부에서 어떤 언질을 받았을까. 한반도에 드리운 먹구름이 짙어만 간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 독립운동의 본거지 중 한 곳이다. 이상설·안창호·박은식·신채호·이동휘 등등, 수많은 지사가 이곳을 거쳐 갔다. 북간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온 안중근도 빠뜨릴 수 없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의병부대를 조직, 독립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도 도모했다.

주민 고통에 귀 닫은 김정은·푸틴
안중근의 블라디보스토크 명칼럼
“교만한 무리에 백성들만 죽어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러시아 한인이 만든 최초의 한글 일간지 ‘해조신문’이 있었다. 한·러 무역을 개척한 ‘무역왕’ 최봉준이 운영했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이 주필로 활동했다. 1908년 2월 26일 창간돼 비록 3개월 남짓 발간됐지만 조선인의 실력 배양을 북돋웠다.
 안중근은 해조신문 1908년 3월 8일자에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을 기고했다. 현재 서울 남산공원 안중근기념관 앞에 이 글을 새긴 커다란 석조물이 놓여 있다. 안 의사는 백척간두의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동포들이 원통하게 죽고 죄 없는 조상의 백골마저 깨뜨리는 소리를 참아듣지 못하겠다”며 불화로 갈라진 고향 땅에 눈물을 흘렸다.
 “교만한 무리들은 저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저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동등한 자는 서로 다투어 아랫사람이 안 되려 하니, (…) 교만을 바로잡는 것은 겸손 바로 그것이다. (…) 동포들아! 각각 불화 두 글자를 깨뜨리고 결합 두 자를 굳게 지켜 (…) 육대주가 진동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
 115년 전의 절규가 지금 여기에도 들려오는 듯하다. 겸손과 타협을 저버리고 오만과 비방에 몰두하는 2023년의 우리 정치판을 꾸짖는 듯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안중근을 다시 불러낸 것은 역설적으로 김정은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덕분이다. 국제적 고립에 빠진 두 ‘안티 히어로’의 잘못된 만남이 한 세기 전 우리의 비참했던 상황과 또 이를 헤쳐가야 했던 독립지사들의 고투를 돌아보게 한다.
 실제로 이번 김정은의 방러 코스가 한국 독립운동사의 큰 흐름과 맞닿아 있다. 우선 지난 13일 두 지도자가 ‘깜짝쇼’처럼 회동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가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의 빌미가 됐던 ‘자유시 참변’(1921)의 무대였다. 또 김정은이 15일 찾아간 하바롭스크 인근의 전투기 공장은 이동휘·김알렉산드라 등이 한인사회당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펼친 곳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 때아닌 이념 전쟁이 뜨겁다. 홍범도 장군 후폭풍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때 많은 독립지사가 러시아 공산당과 손잡은 것은 항일독립이란 대의와 당대의 역사적 조건에 따른 선택이었다.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그들의 피땀을 부정하는 건 역사의 큰 맥을 잘라내는 아전인수식 단견일 뿐이다. 안 의사가 정파와 이념으로 조각난 지금의 우리를 보고도 “나의 뼈를 조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다시 남길지 모르겠다.
 사는 게 퍽퍽하고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 까닭일까. 요즘 ‘무빙’ ‘힙하게’ 등 초능력자 드라마가 인기다. 수퍼맨·원더우먼·터미네이터·엑스맨 등을 버무린 듯한 그들의 판타스틱 활약에 잠시 번잡한 일상을 잊는다. 그런데 ‘무빙’의 대사 하나가 명품이다.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 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이 시대 이념의 족쇄를 풀어갈 열쇠말 같다. 북한 주민과 우크라이나인의 고통에 귀를 닫은 ‘가짜 영웅’ 김정은과 푸틴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