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국가의 품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전 총장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전 총장

요즘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실제로 1인당 국민소득이나 국가 전체의 경제 규모 등 객관적인 지표도 그렇고, G20 등 국제 외교무대에서 받는 대우도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특히 한류(韓流)의 유행으로 세계적으로 한국은 가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이제 변방의 잘 안 알려진 조그마한 국가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국민 의식의 변화도 가져와서 과거처럼 문제가 생기면 선진국을 바라보는 습관을 극복하고 우리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이기 시작했다. ‘빠른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자’로 발돋움하려는 자세를 갖추려는 것이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 왔으나
선진국의 품격은 아직도 못 갖춰
국가 위상 낮춘 기초연구비 삭감
시스템 고치고 국제규범 지켜야

그러나 갑자기 돈이 생긴 벼락부자처럼 여기저기 빈틈도 보인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국가에도 품격이 있다. 인격이 그 사람의 많은 인생 경험과 수련을 통해서 길러지듯이 소위 국격(國格)도 연륜과 집단 지성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면이 많다. 최근 대표적인 예로 새만금 잼버리 사태를 들 수 있다. 세계 158개국에서 4만3000여명의 손님을 불러놓고 심각한 준비 부족을 드러내 커다란 국가적 망신을 당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 등 굵직굵직한 국제행사들을 유치해서 성공적으로 치러 왔다. 이때마다 초기에는 잘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결국은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그러나 관련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때에도 시스템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성공적인 개최로 이어졌다기보다는 개인들의 임기응변적 대응이 중요했다고 한다. 새만금 잼버리 대회 실패는 시스템의 뒷받침은 물론 개인적인 임기응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진국이라면 개인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시스템이 탄탄히 갖추어줘야 한다. 이제 잼버리 사태는 어떻게든 마무리 지었으니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시스템을 정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텐데, 정치권은 책임 소재를 서로 미루는 정쟁만 눈꼴사납게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걱정이다.

정치권이 우리나라의 품격을 훼손하는 일은 그 외에도 많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도 한 예다. 많은 전문가가 국제적인 안전 기준을 충족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조사에 의하면 아직도 많은 국민이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대처에 대해 부족한 점이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하는 것은 야당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합리적이고 국제적인 기준에 맞아야 한다. 학계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를 ‘돌팔이 과학자’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여러 나라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내놓은 국제기구의 보고서에 대해 특정 국가의 로비 의혹까지 제기하며 폄훼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과학계의 원칙은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과학적인 사실을 가지고 토론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는 부끄러운 국내 정치의 민낯을 세계에 널리 보여주는 것으로, 국가 위상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진정한 선진국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또 하나의 필수 요건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인류의 발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ODA(공적개발원조)등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자금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경제적 지원 외에 인류의 지적재산에 기여하는 일도 중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초연구 지원이다. 기초연구란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진화 등 특별한 응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연구를 말한다. 그동안 뉴턴이나 다윈,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기초연구의 결과는 인류의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관념을 형성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가 기여한 바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연구개발투자가 활발한 국가이지만 주로 산업 발전을 위한 응용·개발 연구비이고, 기초연구 투자는 빈약하였기 때문이다. 2021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연구개발 총투자액은 세계 5위이나, 연구비의 성격별로 볼 때 기초연구투자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내년도 예산에서 기초연구비를 전년도보다 6.2%나 삭감하였다. 아직도 개발도상국일 때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선진국 역할을 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 속에서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것은 매우 대견한 일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 왔다고 해서 바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아르헨티나처럼 다시 후진국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시스템을 정비하고, 국제규범에 맞게 행동하며, 책임 있는 지구촌의 구성원으로서 인류의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 선진국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어야 하는 이 숙제를 우리는 잘해낼 수 있을까.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