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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스’ 사태가 일본에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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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한때 ‘쟈니스 월드’에 빠져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한 사람으로 최근 사태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지난 3월 영국 BBC 방송의 폭로로 드러난 연예기획사 ‘쟈니스(Johnny’s)’의 창업주 고(故) 쟈니 기타가와(ジャニー喜多川·1931~2019) 사장의 성폭력 문제는 이제서야 수습 단계로 들어서는 모양새다. 쟈니 사장에게 피해를 본 과거 연습생들이 얼굴을 공개하고 기자회견을 연 후에도 ‘고인의 일이라 진상을 알 수 없다’고 발을 뺐던 기획사는 지난 7일 처음으로 성폭력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외부 전문가단의 조사 결과 쟈니 전 사장이 약 50년간 최소 수백 명의 소년 연습생들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7일 기자회견에서 사임을 발표한 후지시마 주리 ‘쟈니스’ 사장(오른쪽)과 ‘소년대’ 출신의 히가시야마 신임 사장. [AP=연합뉴스]

7일 기자회견에서 사임을 발표한 후지시마 주리 ‘쟈니스’ 사장(오른쪽)과 ‘소년대’ 출신의 히가시야마 신임 사장. [AP=연합뉴스]

쟈니스 사태에선 일본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미 1999년 주간지 슈칸분슌이 쟈니 사장의 성폭력 문제를 보도해 법정 공방이 벌어졌고, 대법원에서 보도 내용이 사실이란 판결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세상은 눈을 감았다. ‘스맙(SMAP)’ ‘아라시’ 등 유명 아이돌 그룹을 거느린 쟈니스의 파워를 두려워해서다. 침묵했던 미디어들은 이제서야 “당시만 해도 남성이 성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등의 변명을 내놓는다. 권위에 대한 도전에 눈을 흘기는 순응적인 사회 분위기, 낮은 인권 의식, 그리고 외부(주로 서구 미디어나 유엔)의 비판이 있어야 비소로 문제를 직시하는 수동성 등이 이 문제를 여기까지 끌어왔다.

시대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할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이런 닫힌 문화가 결국 일본 대중음악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비판도 이제서야 나온다. 특히 소속 연예인들의 사진 한 장에도 더없이 까다롭던 쟈니스의 폐쇄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음악 시장이 온라인 중심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쟈니스 소속 가수들의 음악은 최근에야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게 됐다. BTS 등 한국 아티스트들이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활용해 세계로 뻗어가는 동안, 쟈니스를 필두로 한 일본 음악계는 자신들의 성안에 머물며 안으로 곪아갔다.

이 문제가 터진 후 “일본 음악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한국 기획사들의 음모”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퍼진 것은 그만큼 위기감이 크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한때 ‘일본 쇼 비즈니스의 모든 것’이었던 쟈니스는 과연 창업주의 과오를 털어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쟈니스 사태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앞으로의 일본 음악계, 더 나아가 일본 사회의 미래를 정하는 중요한 방향키가 될 것이란 느낌은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