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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불편하고 부당한 판사

중앙일보

입력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미국 몬태나주 지방법원 판사 리처드 세불은 2012년 지인 7명에게 사적인 e메일을 보냈다. 그 안에 다음과 같은 괴이한 농담이 있었다. “한 소년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검은데 왜 엄마는 하얘요?’ 엄마가 답했다. ‘버락, 그런 말 하지 마라. 그 파티를 기억해 보건대, 네가 동물이 아니고 사람인 게 다행이야(From what I can remember about that party, you’re lucky you don’t bark)’.” 여기에서 버락은 당시 현직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의미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친은 흑인이고, 모친은 백인이다.

“재판·법관 공정해 보여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인용한 규범
‘불편부당’ 등진 판사에겐 왜 침묵

그가 이런 e메일을 작성했다는 사실이 지인을 통해 유포됐고,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지탄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과 가족에게 편지를 써 사과했다. 그래도 상황이 수습되지 않았다. 인종차별 성향을 지닌 사람은 법관 자격이 없다, 그의 판결은 공정하다고 믿을 수 없게 됐다는 비판이 계속됐다. 뉴욕타임스도 그런 취지의 사설을 썼다. 세불 판사는 법원 윤리위원회 조사를 받았다. 위원회는 그가 지인에게 4년간 보낸 e메일에서 공정하지 않은 판사라는 인식을 갖게 할 다수의 표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사표를 냈다.

 미국 뉴햄프셔주 대법원 판사 존 루이스는 2013년 7월 몇몇 공무원 앞에서 “여성 법조인이 많아지면서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가 성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루이스 판사는 여성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자신의 딸도 로스쿨을 나왔다며 여성의 법조계 진출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사건 역시 윤리위원회에 회부됐다. 루이스 판사는 수개월 뒤 법원을 떠났다. 정년퇴직을 3년 남겨놓은 때였다. 그래도 위원회 조사는 멈추지 않았다. 루이스 판사의 과거 여성 상대 폭력·학대 사건 판결을 검증했다. 위원회는 부적절해 보이는 판결은 없었다고 밝히면서도 징계 처분을 내렸다. 루이스 판사가 다시는 재판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세불 판사와 루이스 판사에 대한 윤리위원회 조사는 미국 법관행동규범 2조에 근거한 것이었다. ‘법관은 부적절함(impropriety)을 피해야 하고, 모든 행동에서 부적절해 보이는 것(appearance of impropriety in all activities)도 피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부적절함에는 불공정·불공평도 포함된다. 이 표현은 1954년에 펠릭스 프랭크퍼터 미국 연방대법관이 한 “정의는 정의의 외관도 충족시켜야 한다”는 말에 뿌리가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8년 6월 15일에 대국민 담화문을 내놓았다. 흔히 ‘사법농단 사건’이라고 불리는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 의혹과 관련해 “인적·물적 조사 자료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공하겠다”는 뜻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검찰의 압수수색이 시작됐다. 김 대법원장은 담화문에 “재판은 무릇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외관에 있어서도 공정해 보여야 한다”고 적었다.

 정진석 의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 1심 판결(징역 6개월)을 한 서울중앙지법 박병곤 판사는 지난해 대선 직후 SNS에 “이틀 정도 소주 한잔하고 울분을 터뜨리고 절망도 하고 슬퍼도 했다가 사흘째부터는 일어나야 한다”고 썼다.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패배한 2년 전 서울시장 선거 뒤에는 ‘피를 흘릴지언정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는 대사가 자막으로 떠 있는 드라마 장면을 SNS에 게재했다.

정 의원에 대한 판결이 과연 합당하냐를 떠나 이제 박 판사가 맡는 재판의 피고인은 ‘정치적 선고’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법원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할 것이라는 기대가 불편(不便)하고 부당(不當)한 판사에 대한 걱정으로 변했다. 박 판사는 지금도 재판을 하고 있고, 공정을 강조했던 김 대법원장은 아무 말이 없다.

글=이상언 논설위원 그림=임근홍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