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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 없는 횡단보도...달리던 차를 멈추게 하는 이 '손짓'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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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호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손을 올려 길을 건너려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사진 도로교통공단

무신호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손을 올려 길을 건너려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사진 도로교통공단

 꼭 1년 전이다. 보행자 보호의무를 대폭 강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지난해 7월 중순부터 시행됐다. 우선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선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라도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든 없든 모든 차량은 무조건 일시정지토록 했다.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를 우선 보장하는 ‘보행자 우선도로’개념도 도입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 때에도 자동차에 일시정지 의무를 부여한 것이었다. 횡단보도 안팎에 행인이 보이면 일단 차를 멈추라는 얘기다. 이전까지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있을 때만 잠시 정차하면 됐다. 이를 위반했다가 적발되면 범칙금 6만원(승용차 기준)에 벌점 10점이 부과되고 보험료도 오른다.

 이처럼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보호의무를 이례적으로 강화한 배경엔 이런 조사결과들이 있다. 지난 2019년 8월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청주시와 대전시의 왕복 4차로 도로에서 이틀간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는 보행자를 위해 정지한 차량의 비율을 확인해 봤다. 조사는 제한속도가 시속 30㎞인 도로와 50㎞인 도로로 나누어 시행했고, 별도의 차량·보행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대상이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제한속도가 시속 30㎞인 도로에서는 무신호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40번의 시도 중에서 차량이 멈춰선 경우가 8번(20%)이었다. 하지만 시속 50㎞인 도로에선 40번의 시도 가운데 단 한 차례만 차량이 멈췄다. 이 때문에 길을 건너기 위해 걸린 시간이 평균 37.3초나 됐다. 양보하는 차량이 거의 없는 탓에 접근하는 차가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2019년 실험 당시 무신호 횡단보도 양보비율. 자료 한국교통안전공단

2019년 실험 당시 무신호 횡단보도 양보비율. 자료 한국교통안전공단

 이듬해인 2021년 4월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진행한 조사 역시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 종로구의 진출입로와 단일로, 어린이보호구역 등 5곳의 보행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행인이 길을 횡단하려고 할 때 멈추는 차량의 비율을 따져봤다.

 이에 따르면 총 185차례 길을 건너고 있거나 건너려고 시도하는 동안 보행자를 위해 운전자가 정차한 사례는 8회(4.3%)에 그쳤다. 특히 왕복 2차로의 단일로에 있는 무신호 횡단보도에선 길을 건너려는 행인이 있는데도 79대의 차량 모두 일시정지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초등학교 앞 도로에서도 보행자를 위해 차를 멈추는 경우가 36대 중 2대에 그쳤다.

 실태가 이렇다 보니 아예 보행자가 횡단보도 부근에 보이기만 해도 차량은 무조건 일시정지토록 법 규정을 강화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는 횡단보도 근처에 행인이 나타나면 대부분 차가 멈춰 서고, 보행자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리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선진국에선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보이면 대부분 정지하고 기다린다. 사진 교통안전공단

선진국에선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보이면 대부분 정지하고 기다린다. 사진 교통안전공단

 그런데 바뀐 법 규정을 따르려고 보니 현장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생겼다. 운전자 입장에서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지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호소가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청 산하기관인 도로교통공단이 지난해 8월 말과 9월 초 서울역 부근의 한 무신호 횡단보도에서 실시한 실험이 주목을 받았다.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번씩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량이 일시정지하는지를 살폈다.

 우선 보행자가 별다른 의사표시 없이 길을 건너려고 했을 때는 50대 중 17대(34%)만 멈춰섰다. 하지만 보행자가 길을 건너겠다는 의미로 손을 어깨높이 정도까지 들어 올리자 결과는 크게 달라졌다. 50대 중 무려 44대(88%)가 일시정지했다. 손을 들고 안 들고에 따라서 일시정차율이 50%p 넘게 뛰어오른 셈이다.

 비결이 뭘까. 도로교통공단 안전교육부의 정의석 교수는 “보행자의 가벼운 손짓은 운전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브레이크를 밟도록 하는 일종의 ‘넛지(Nudge)’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며 “강요에 의한 행동 변화와 달리 자연스러운 행동 유도는 운전자의 거부감도 줄이게 된다“고 말했다.

 만남과 소통에서 시각·청각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메라비언의 법칙’을 인용해 설명하기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의 심리학과 명예교수인 앨버트 메라비언이 1971년 발표한 것으로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이고 언어는 7%를 차지한다는 내용이다. 손을 들어 올리는 적극적인 시각적 의사 표시가 그만큼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횡단보도 손짓 캠페인 포스터. 자료 도로교통공단

횡단보도 손짓 캠페인 포스터. 자료 도로교통공단

 이러한 실험을 계기로 도로교통공단에서는 횡단보도에서 손을 올려 길을 건너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손짓 캠페인’을 시작했다. 서울 서초구청 같은 기초지자체와 경찰서, 교육청, 군부대 등과 공동으로 전국 곳곳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아직 캠페인 효과를 본격적으로 평가한 연구가 없어 정확한 효용을 언급하긴 어렵다.

 그러나 법 시행 이후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보호의무를 준수하는 차량이 많아진 걸 확인할 수 있다. 도로교통공단이 서울과 대구, 인천, 경기지역의 29개 교차로 50개 지점의 폐쇄회로 TV(CCTV) 영상을 확보해 법 개정 이전(2019~2021년)과 시행 약 3개월 후(2022년)를 비교·분석한 결과다. 법 시행 전엔 준수율이 35.8%였지만 시행 이후엔 78%로 치솟은 것이다. 또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보행 중 사망자 숫자도 계속 줄고 있다.

 물론 이런 간접 수치들만으로 '손짓'의 효과를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행자의 적극적인 의사표시가 차량의 일시정지를 유도해 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이주민 도로교통공단 이사장은 “조만간 손짓 캠페인의 효과 분석에 착수할 계획”이라며 “그 결과를 반영해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캠페인과 운전자 대상 교육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적극적인 소통의 중요성은 교통안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원활한 소통은 곧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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