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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국제선 여객기와 ‘비상 착륙공항’, 멀수록 유리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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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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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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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노선 비행시간 단축한다.”

국내 신생 항공사인 에어프레미아는 얼마 전 이런 제목이 적힌 홍보자료를 냈다. 얼핏 장거리 노선에 유리한 더 빠른 비행기를 도입한다는 얘기 아닌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에어프레미아가 보유한 B787-9 여객기가 국토교통부로부터 ‘회항시간 연장운항(EDTO, Extended Diversion Time Operation)’ 180분을 승인받았다는 것이다. 종전의 120분에서 늘어난 수치로 지난해 10월 인천~로스앤젤레스(LA) 노선에 취항한 지 8개월 만의 성과라고도 했다.

이 항공사가 EDTO 시간이 늘어난 걸 반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EDTO는 엔진 2개 이상을 장착한 상업용 항공기가 운항 도중 한쪽 엔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머지 엔진으로 비상 착륙할 공항(교체공항)까지 운항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규정이다. 예를 들어 국토부로부터 EDTO-120을 인증받았다면 해당 항공기는 엔진 한 개가 고장 날 경우 다른 엔진만으로 2시간 안에 사전에 인가받은 공항(항로상 교체공항)에 비상착륙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엔진 꺼졌을 때 회항시간 기준
시간 짧으면 공항 근처 날아야
비상공항서 멀면 운항거리 줄어
1953년 첫 도입 이후 연장 추세

여객기 기종, 노선별 승인 받아야

장거리 국제선을 뛰는 항공사들은 EDTO를 얼마나 길게 받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사진은 전 세계 항공로 현황. [사진 ICAO 홈페이지]

장거리 국제선을 뛰는 항공사들은 EDTO를 얼마나 길게 받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사진은 전 세계 항공로 현황. [사진 ICAO 홈페이지]

중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려는 항공사들은 해당 정부로부터 여객기 기종과 취항 노선별로 EDTO 승인을 받는다. 국내선이나 비행거리가 짧은 국제선은 주변에 비상착륙할 공항이 1시간 이내에 여럿 있기 때문에 별도로 ‘회항시간 연장운항’이 필요치 않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엔진이 2개인 쌍발기는 비상시 한 시간 안에 지정된 공항으로 회항할 수 있어야 하지만 기종과 엔진 성능, 운항 경험, 승무원 교육 등에 따라 75분, 120분, 180분, 207분 등으로 늘려준다. 같은 기종과 노선이라도 항공편별로 시간이 달라지기도 한다. 요즘 항공기는 A380, B747 등 일부 대형 비행기를 제외하곤 대부분 엔진이 2개다. 엔진 3개 이상의 항공기는 기본 EDTO가 180분이지만 화물기는 별다른 제한이 없다.

에어프레미아는 그동안 LA 노선의 EDTO가 120분이었기 때문에 유사시 이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육지 쪽에 있는 비상 착륙공항에 붙어서 운항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항로에 비해 운항거리와 비행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주를 오갈 때 가장 시간이 절약되는 ‘태평양 항로’를 이용하고 싶어도 ‘그림의 떡’이었던 셈이다.

EDTO를 어기고 운항하면 강한 제재를 받는다. 10여 년 전 부산에서 출발해 사이판으로 향하던 우리 국적기가 엔진 경고등이 들어온 상태에서 인가받은 EDTO를 초과해 비행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해당 항공사는 운항정지, 기장은 자격정지 처분을 각각 받아야만 했다.

다른 운항 조건은 다 충족되더라도 출발 당일 이용하려고 지정한 ‘항로상 교체공항’의 날씨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나빠지면 비상착륙이 어렵기 때문에 EDTO 규정을 맞출 수 없게 된다. 이러면 출발이 늦어지거나 아예 연기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에어프레미아의 LA 노선과 뉴욕 노선은 ‘항로상 교체공항의 기상 악화’를 이유로 지연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승객들이 EDTO 규정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간에 위치한 공항의 날씨가 안 좋아서 비행기가 못 뜬다고 하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 때문에 에어프레미아가 상당히 곤혹스러워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에 EDTO가 180분으로 늘어나면서 숨통이 트이게 됐다. 3시간 이내에만 회항하면 되기 때문에 태평양 항로 이용도 가능해진다. 에어인천의 조용무 운항통제실장은 “매일 매일 상층 기상을 분석해 동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연결하는 태평양 위에 설정되는 ‘태평양 항로’를 제한 없이 이용하기 위해선 EDTO 180분 인가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에어프레미아가 반색하는 까닭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사시 비행기의 장거리 운항요건을 정한 건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이 비행기에 장착된 엔진의 수와 관계없이 모든 상용 항공기는 비상 상황 때 적절한 착륙공항으로부터 100마일(약 160㎞) 이내에 있는 항로로만 비행토록 한 것이다. 당시 비행기들이 엔진 하나가 꺼진 상황에서 약 60분 정도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진 걸 고려해서라고 한다.

또 ‘ETOPS 제도의 발전 및 향후 우리의 대응 방향’(박주환, 항공진흥 제50호, 2009년)이란 논문을 보면 FAA는 1953년 쌍발 비행기는 착륙에 적합한 공항으로부터 순항속도로 한 시간 이내의 항로로 운항해야 한다는 ‘60분 규칙’을 수립했다. EDTO의 전신인 ETOPS(Extended Operations)가 생겨난 것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도 모든 항공기의 적절한 회항가능 시간을 90분으로 정할 것을 회원국들에 권고했다.

항공기술 더 발달하면 역할 감소

이러한 규정은 1970년대 들어 항공기 엔진 성능이 급격하게 향상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엔진 고장률이 줄어들고, 비행기가 커지고 빨라지면서 종전의 회항 규정을 유연화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FAA는 1985년 비상시 회항시간을 120분까지 할 수 있도록 ETOPS 운항지역을 확대했고, 1988년에는 75분·120분·180분의 ETOPS 운항 기준도 마련했다. ICAO에선 ETOPS란 용어를 써오다 2012년부터 EDTO로 바꿨다.

국내에선 1991년 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ETOPS 운항허가 신청절차를 처음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유경수 국토부 항공안전정책관은 “EDTO 인가 검토는 국토부 내 운항·정비·운항관리 전문가들이 수행하며, 필요하면 해당 기종 제작 당국이나 제작사의 기술정보도 확인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항로 단축을 통해 비행시간과 연료 절감을 위한 EDTO는 항공기 제작기술이 더 발달하면 그 역할이 점점 축소될 거란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