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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쾌청한데 LA행 비행기 못떠? 여행객 황당한 날씨규정 비밀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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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준 세계 항공로 분포도. 자료 ICAO 홈페이지

2018년 기준 세계 항공로 분포도. 자료 ICAO 홈페이지

 "장거리 노선 비행시간 단축한다."

 국내 신생 항공사인 에어프레미아는 얼마 전 이런 제목이 적힌 홍보자료를 냈다. 얼핏 장거리 노선에 유리한 더 빠른 비행기를 도입한다는 얘기 아닌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내용인즉슨, 에어프레미아가 보유한 B787-9 여객기가 국토교통부로부터 '회항시간 연장운항(EDTO, Extended Diversion Time Operation)' 180분을 승인받았다는 것이다. 종전의 120분에서 늘어난 수치로 지난해 10월 인천~로스앤젤레스(LA) 노선에 취항한 지 8개월만의 성과라고도 했다.

 이 항공사가 EDTO 시간이 상향조정된 걸 반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EDTO는 엔진 2개 이상을 장착한 상업용 항공기가 운항 도중 한쪽 엔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머지 엔진으로 비상 착륙할 공항(교체공항)까지 운항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규정이다. 

에어프레미아는 최근 EDTO-180을 승인받았다. 사진 에어프레미아

에어프레미아는 최근 EDTO-180을 승인받았다. 사진 에어프레미아

 예를 들어 국토부로부터 EDTO-120을 인증받았다면 해당 항공기는 엔진 한 개가 고장 날 경우 다른 엔진만으로 2시간 안에 사전에 인가받은 공항(항로상 교체공항)에 비상착륙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중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려는 항공사들은 해당 정부로부터 여객기 기종과 취항 노선별로 EDTO 승인을 받는다. 국내선이나 비행거리가 짧은 국제선은 주변에 비상착륙할 공항이 한 시간 이내에 여럿 있기 때문에 별도로 '회항시간 연장운항'이 필요치 않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엔진이 2개인 쌍발기는 비상시 한 시간 안에 지정된 공항으로 회항할 수 있어야 하지만 기종과 엔진 성능, 운항 경험, 승무원 교육 등에 따라 75분, 120분, 180분, 207분 등으로 늘려준다. 같은 기종과 노선이라도 항공편별로 시간이 달라지기도 한다. 

 요즘 항공기는 A380, B747 등 일부 대형 비행기를 제외하곤 대부분 엔진이 2개다. 엔진 3개 이상의 항공기는 기본 EDTO가 180분이지만 화물기는 별다른 제한이 없다.

대한항공이 운영하는 A380은 엔진이 4개로 기본 EDTO가 180분이다. 연합뉴스

대한항공이 운영하는 A380은 엔진이 4개로 기본 EDTO가 180분이다. 연합뉴스

에어프레미아는 그동안 LA 노선의 EDTO가 120분이었기 때문에 유사시 이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육지 쪽에 있는 비상 착륙공항에 붙어서 운항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항로에 비해 운항거리와 비행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주를 오갈 때 가장 시간이 절약되는 '태평양 항로'를 이용하고 싶어도 '그림의 떡'이었던 셈이다.

 EDTO를 어기고 운항하면 강한 제재를 받는다. 10여년 전 부산을 출발해 사이판으로 향하던 우리 국적기가 엔진 경고등이 들어온 상태에서 인가받은 EDTO를 초과해 비행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해당 항공사는 운항정지, 기장은 자격정지 처분을 각각 받아야만 했다.

 다른 운항 조건은 다 충족되더라도 출발 당일 이용하려고 지정한 '항로상 교체공항'의 날씨가 일정수준 이하로 나빠지면 비상착륙이 어렵기 때문에 EDTO 규정을 맞출 수 없게 된다. 이러면 출발이 늦어지거나 아예 연기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에어프레미아의 LA 노선과 뉴욕 노선은 '항로상 교체공항의 기상 악화'를 이유로 지연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승객들이 EDTO 규정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간에 위치한 공항의 날씨가 안 좋아서 비행기가 못 뜬다고 하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 때문에 에어프레미아가 상당히 곤혹스러워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EDTO가 짧으면 항로상 교체공항의 기상 상황에도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연합뉴스

EDTO가 짧으면 항로상 교체공항의 기상 상황에도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번에 EDTO가 180분으로 늘어나면서 숨통이 트이게 됐다. 3시간 이내에만 회항하면 되기 때문에 태평양 항로 이용도 가능해진다. 에어인천의 조용무 운항통제실장은 “매일 매일의 상층 기상을 분석해 동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연결하는 태평양 위에 설정되는 ‘태평양 항로’를 제한 없이 이용하기 위해선 EDTO 180분 인가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에어프레미아가 반색하는 까닭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사시 비행기의 장거리 운항요건을 정한 건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이 비행기에 장착된 엔진의 수와 관계없이 모든 상용 항공기는 비상 상황 때 적절한 착륙공항으로부터 100마일(약 160㎞) 이내에 있는 항로로만 비행토록 한 것이다. 당시 비행기들이 엔진 하나가 꺼진 상황에서 약 60분 정도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진 걸 고려해서라고 한다.

 또 「ETOPS 제도의 발전 및 향후 우리의 대응 방향」(박주환, 항공진흥 제50호, 2009년)이란 논문을 보면 FAA는 1953년 쌍발 비행기는 착륙에 적합한 공항으로부터 순항속도로 한 시간 이내의 항로로 운항해야 한다는 '60분 규칙'을 수립했다. 

미국 워싱턴의 미 연방항공청 사무실 바닥 카페트에 그려진 연방항공청 로고.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의 미 연방항공청 사무실 바닥 카페트에 그려진 연방항공청 로고. 연합뉴스

EDTO의 전신인 ETOPS(ExTended OPerationS)가 생겨난 것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도 모든 항공기의 적절한 회항가능 시간을 90분으로 정할 것을 회원국들에 권고했다.

 이러한 규정은 1970년대 들어 항공기 엔진의 성능이 급격하게 향상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엔진 고장률이 줄어들고, 비행기가 대형화되고 빨라지면서 종전의 회항 규정을 유연화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FAA는 1985년 비상시 회항시간을 120분까지 할 수 있도록 ETOPS 운항지역을 확대했고, 1988년에는 75분·120분·180분의 ETOPS 운항 기준도 마련했다. ICAO에선 ETOPS란 용어를 써오다 2012년부터 EDTO로 바꿨다.  

국제민간항공기구는 2012년부터 ETOPS 대신 EDTO란 용어를 쓰고 있다. 사진 ICAO 홈페이지

국제민간항공기구는 2012년부터 ETOPS 대신 EDTO란 용어를 쓰고 있다. 사진 ICAO 홈페이지

 국내에선 1991년 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ETOPS 운항허가 신청절차를 처음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유경수 국토부 항공안전정책관은 “EDTO 인가 검토는 국토부 내 운항·정비·운항관리 전문가들이 수행하며, 필요시 해당 기종 제작 당국이나 제작사의 기술정보도 확인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항로 단축을 통해 비행시간과 연료 절감을 위한 EDTO는 항공기 제작기술이 더 발달하면 그 역할이 점점 축소될 거란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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