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사클레연 노만규박사/31년만에 꼬마 은인 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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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원자력석학 만든 고사리 저금통/“유학비 부족” 신문 보고/2천5백환 선뜻 우송
입학금 3백달러가 없어 애태우던 한 미국 유학생과 그의 딱한 사정을 전해듣고 「2천5백환」을 보내줬던 당시 국민학교 1학년생이 각기 어른이 돼 31년만에 만났다.
주인공은 프랑스 원자력청 산하의 최대연구소인 사클레연구소 수석연구부장인 세계적인 석학 노만규박사(54)와 서울 구로동에서 조그만 목형회사를 운영하는 백용기씨(38).
이들의 만남은 금년 중앙일보 창간기념특집(9월20일자 18면)에 세계적인 과학자의 한사람으로 소개된 노박사의 기사를 보고 백씨가 본사에 연락을 취해 이뤄졌다.
백씨는 본사의 주선으로 지난달 28일 아버지 백문수씨(67)와 함께 서울대 호암생활관 302호실에서 노박사를 만났다.
노박사는 9월4일 교환교수로 한국에 와 머물다 2일 프랑스로 돌아간다.
첫 인사를 나누고도 다소 어색해 하던 이들은 백씨가 갖고 온 당시의 신문기사와 노박사의 부친 노병석씨(당시 45세·63년 작고)가 백씨에게 보낸 편지를 펴보이는 순간 30년 전으로 돌아가 옛 기억들을 되살려 나가기 시작했다.
백문수씨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59년 11월16일자 민주신보에 「천재 원자학도의 SOS」란 기사가 실렸었지요. 이 기사에는 한국유학생 노군이 미국 클라크대를 졸업,하버드대나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으나 입학수속에 필요한 3백달러를 마련할 길이 없어 애태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씨는 이 얘기를 아침식사 시간에 가족들에게 했더니 국민학교 1학년이던 큰아들 용기가 학교 우체국에 넣어둔 자신의 저금을 찾아달라고 졸랐다는 것이다. 저금액 「2천5백환」은 당시 쌀 한가마값쯤 됐다고 백씨는 회상했다.
이들이 상봉하던날 노박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것은 백씨 부자가 30년을 간직해온 한통의 편지였다. 노박사의 부친이 돈을 전해받고 백군이 당시 다니던 경남 진해 대야국민학교로 보낸 감사의 편지였다.
「단기 4292년(1959년) 12월9일자」 소인이 찍힌 이 편지는 겉봉은 유려한 한자로,속지는 2장의 편지지에 순한글로 앞뒤 가득히 적혀 있었다. 30년의 세월을 말해주듯 빛이 바래 있었으며 편지지는 테이프로 땜질돼 있었다.
이 편지에는 『사탕 사먹기도 바쁜 돈을 저축하면서 액수가 늘어나는 재미를 마다한채 「미국에 있는 학생에게 그 돈을 보내줘 진학할 수 있도록 하자」고 아버지를 졸라 보내준 2천5백환을 미국으로 보내주었다』며 『저금통을 몽땅 털어 보내준 동포애에 나는 한없이 울었다』는 말로 첫째장을 끝맺고 있었다.
노박사는 백용기씨에게 『어떻게 어린나이에 그같은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까』라며 어른이 된 백씨의 어깨를 힘차게 흔들었다.
편지에 얽힌 사연들,노박사의 고생스러웠던 얘기들을 3시간 가량 시간 가는줄 모르고 나눈뒤 노박사는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직접 적어주며 재회를 기약했다.<신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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