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지금 ‘윤석열 시계’를 찬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허진 기자 중앙일보 기자
허진 정치부 기자

허진 정치부 기자

“새롭게 정권 교체가 되면서 맞게 된 오늘의 5·18은 그 어떤 때보다 남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 멋있는 명연설을 처음 봤던 것 같고요.”

2017년 5월 18일 밤 10시 SBS FM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5·18 기념식을 찬양하며 이런 말을 했다. ‘명연설’의 주체를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당시 기념사는 대통령 몫이었다. 시사 프로그램이 아닌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이처럼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어안이 벙벙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해 5월 공개 된 윤석열 대통령 기념 시계. 앞면에 ‘대통령 윤석열’ 서명을 새겼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 공개 된 윤석열 대통령 기념 시계. 앞면에 ‘대통령 윤석열’ 서명을 새겼다. [연합뉴스]

이 방송의 진행자인 아나운서는 그해 8월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 대국민 보고회’에서 고민정 당시 청와대 부대변인과 진행을 맡았다. 이후 이른바 ‘이니 시계’로 불리는 ‘문재인 시계’를 선물 받은 그는 보이는 라디오 방송에서 시계를 찬 손목을 들어 보여 “시계 자랑”이란 기사가 나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주먹을 불끈 쥔 그림이 담긴 휴대전화 케이스를 찍은 사진까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그는 그 시계를 차고 영국 축구 중계도 했다.

이 아나운서는 그해 8월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MBC 본부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제작 중단을 시작하자 “뭐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까”라며 응원했다. 이 아나운서 역시 언론노조 활동을 했다.

이 글을 쓰는 건 아나운서 개인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언론노조가 주류인 공중파 방송의 분위기가 어떻길래 이렇게 처신했어도 재직 시절 조직에서 승승장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24일 KBS ‘열린음악회’를 우연히 시청하다가 ‘Song to the moon(달님에게 바치는 노래)’이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걸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날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생일이었고, KBS 방송 기록을 확인해 봤더니 유독 문 전 대통령 생일 즈음에만 이 노래가 두 번이나 방송됐다는 게 드러났다.

KBS·MBC, 소위 공영방송의 미래를 놓고 윤석열 정부와 방송사 및 언론노조가 강대강 충돌을 앞두고 있다. 솔직히 윤석열 정부가 역대 정부와는 다르게 공영방송의 중립성을 엄정하게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공중파에서 ‘윤석열 시계’를 차고 방송하고 그걸 자랑한다면, 윤석열 대통령 생일에 방영되는 열린음악회에서 윤 대통령의 애창곡 ‘아메리칸 파이’가 선곡됐다면 어떻게 될까? 애초 그럴 일도 없겠지만,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마도 언론노조가 가장 먼저 나서 비판할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답은 나온 거 아닌가. 최소한 그동안이 정상이었는지, 비정상이었는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