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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도 아닌, 차정숙도 아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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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속고 살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라는 ‘들장미 소녀 캔디’ 주제가 얘기다. 최근 알게 된 원곡 가사는 이렇다. ‘주근깨 따위, 신경 안 써. 낮은 콧대도 맘에 드는 걸. 말괄량이 장난, 너무 좋아, 달리기도 너무 좋아.’ 비혼 국무위원 (물론 여성) 후보자에게 “본인 출세도 좋지만, 국가 발전에도 기여해 달라”(2019년 인사청문회)고 요구하는 이 사회다운 번안이다.

그래서일까. JTBC ‘닥터 차정숙’을 보며 시원섭섭 개운답답했다. 캔디가 2023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참고 참고 또 참으면 11화까지의 차정숙이 될 것 같아서다. 다시 나 홀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드라마와, 주인공 역할을 멋지게 해낸 엄정화엔 박수를 보낸다. ‘닥터’, 즉 의사 같은 전문직이 아니고, ‘차정숙’ 즉 두 아이를 키워낸 엄마가 아닌 이 사회의 수많은 중년 남녀들에겐 멋진 판타지였다.

지난 4일 막 내린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주연배우 엄정화가 의사 가운 아닌 앞치마 차림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 [사진 JTBC]

지난 4일 막 내린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주연배우 엄정화가 의사 가운 아닌 앞치마 차림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 [사진 JTBC]

여운이 유난했던 장면. 몸 상태도 안 좋으면서 “엄마가 해주는 집밥 오랜만이지”라며 장성한 아들딸에게 국을 끓여 떠주는 차정숙이었다. 결국 그 나잇대의 여성이 사회가 인정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선 ‘엄마’라는 타이틀을 갖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서 대령해야 하는가.

차정숙이 되지 않고 홀로 나이 들어가기를 선택한, 또는 선택당한 이들은 후련한 소외감을 느꼈을 수 있다. 이루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서 다행이라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 이들의 특징. 외롭지만 괴롭지는 않다는 것. 둘이 있어도 더 외로울 수 있는데도, 외로운 건 괴로운 거라고 사회는 말한다.

1970년생 방송언론인, 탬진 파달이 쓴 『뉴 싱글』은 미국에선 2015년 출간됐지만 2023년 대한민국에도 묵직한 의미를 전한다. 여성에게 있는 그대로 나이 들어도, 굳이 착한 들장미 중년이 되지는 않아도 된다는 내용. 대한민국은 여전히 ‘뉴 싱글’보다 캔디형 차정숙이다.

2019년 나온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밥 먹어』. 제목부터 재미있다. 필명 ‘25일’을 쓰는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밥 먹어, 먹고 먹고 또 먹지 굶긴 왜 굶어.” 그래, 밥은 배불리 먹자. 해 먹어도, 사 먹어도 좋다. 닥터도 아니고 차정숙이 아니어도 괜찮다. 참고 또 참으면 안소니도 테리우스도 만날 줄 알았건만, 결국 안소니도 죽고 테리우스도 떠난다. 들장미 노년이 될 때까지, 참지 말고 행복하자, 대한민국 캔디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