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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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3부 남로당의 궤멸/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자서전 쓰게하고는 생트집/죄씌우려 5백명에게 나의 비행보고 지시
53년 3월5일 세계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악당 스탈린이 사망했다. 북로당원 가운데도 스탈린사진을 짓밟으면서 『이 새끼가 10년만 일찍 죽었더라면 우리조선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욕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탈린이 사망하자 노동당과 내각의 명의로 전체인민에게 고하는 특별메시지를 발표,스탈린 사망을 전민족적으로 애도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가운데 소련에서 온 허가이등 지도자들은 6·25 동란에서의 김일성의 무능함과 스탈린 사망후 모스크바의 새바람을 일찍이 감지해 김일성으로부터 떨어져 박헌영편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이같은 눈치를 알아챈 김일성은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 팽덕회와 접근해 드디어 중소 대립이 시작되게 되었다.
김일성은 중공의 후원을 얻어 박헌영·이승엽 등 자기정권에 맹종하지 않는 남로당계를 체포하는 동시에 허가이를 암살해 자살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마침내 모택동­팽덕회­김일성 대 흐루시초프­허가이­박헌영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북한땅에 중공군이 들어와 있는한 아무리 소련이 강대하다고 해도 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북조선에서 모택동에게 패배한 흐루시초프는 너무나 분해 중공에 대한 원조를 일체 중단해버렸다.
여기서 비로소 중소 논쟁이 공식화된 것이었다. 중공군만 북한땅에 진주해 오지 않았더라면 북진했던 유엔군에 퇴각하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김일성은 6·25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권했을 것이다.
나를 미제와 이승만의 간첩이란 죄목을 씌워 죽이려 했으나 내가 한번도 미국기관이나 이승만 경찰에 잡힌 일이 없으니 죄목을 꾸며댈 수가 없었다. 제일 처음 그들은 『이승엽이 미제의 간첩으로 체포되었다』며 나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나도 이승엽과 많이 싸웠는데 신문에 났으면 자세한 것을 좀 보여주시오』하니 아직 신문에는 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출생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자서전을 상세히 쓰라고 했다. 밤낮으로 며칠 걸려 자서전을 써주었다. 10여일후 또다시 자서전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무려 몇달사이에 자서전을 6∼7회나 썼다.
그것을 한자한자 대조해 서로 다른 곳에 표를 해 추궁해 왔다. 사람이 귀신이 아닌 이상 수십년전 일을 일자일획도 틀림없이 똑같게 거듭 기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뒤에 안일이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와 같이 서울에서 일한 당원,그리고 아는 남로당원 5백명을 찾아가 나의 비행을 써바치라해 그 가운데서 나에 대한 공격자료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서가 모두 나를 지하당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한 동지라고 썼던 것이었다.
박헌영이 체포되고 난 후에는 나에게 와서 『박헌영에게 충실했다 하는데 박과는 어떤 관계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박헌영을 존경해 왔었다.
그것은 김일성 동지께서 1945년 말인가 박헌영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박헌영선생 만세」라 했기에 정말 박헌영이 훌륭한 애국자로 알았다. 그때 만일 김일성동지께서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다」라고 하셨다면 내가 제일 먼저 박헌영을 처치했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답했더니 취조관은 두말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뒤에 또 이승엽을 정찰국에 잡아와 취조한다고 했다. 이승엽의 수첩에 내 이름이 두곳에 적혀 있어 나와 무슨관계가 있는가 의심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태식이 이승엽에게 박갑동을 발탁하라고 두번 요청한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승엽과 나와의 관계를 그들은 잘못 알고 일당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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