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의도 빗나간 공청회/이춘성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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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토개발연구원이 8일 여의도에서 개최한 「국민주거생활 안정을 위한 공청회」는 「성공적」이었다.
지금까지의 관제공청회와는 달리 참석자들이 모처럼 하고 싶은 말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날의 주제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미 집 한채라도 갖고 있으면 더이상 싼값에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청약을 할 기회를 주지 말자는게 토론의 주제였다.
가뜩이나 집이 없어 서러운데 집을 마련할 기회마저 「있는」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아야 되느냐는 사회정의 차원의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랬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정부가 한번 「약속」을 했으면 이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게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그 약속의 내용은 다름 아니다.
일정규모의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를 청약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주택은행에 넣어 놓고 기다리는 이른바 청약예금에 들어야 한다는 제도이다.
토론 참석자들은 「가진자」들의 무절제를 개탄했다. 몇채씩 집을 갖고 있으면서 새 아파트에 청약,당첨되면 비싼 값에 파는 행태를 성토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만여명의 기득권자들에 대한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게 대부분 참석자들의 견해였다. 원론에는 이의가 없지만 현실을 감안해야 된다는 대 정부 충고인 셈이다.
당초 이 공청회는 주택문제의 주무부처인 건설부에 의해 마련됐다. 새로 짓는 주택수는 뻔한데 원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고 해서 답답해 민의를 들어보려고 장을 벌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사실 건설부로서는 이미 유주택자에겐 아파트 분양자격을 배제한다는 방침이 내부적으로 서 있었고 공청회라는 전가의 보도를 활용,사회정의구현이라는 대세를 유도해냄으로써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기득권자들의 반발을 사전 「제압」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복안은 감추어 놓은채 힘들지 않게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을 바꾸어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날의 공청회는 건설부에게는 실패작으로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이 공청회는 성공작이었다는게 전반적인 여론이다. 건설부로서는 실패작이었는지 모르지만 더이상 국민들이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는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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