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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8월 수상작] 마스크로 얼굴 가린 지금은 ‘눈빛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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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장원

마스크로 얼굴 가린 지금은 ‘눈빛의 시대’

마스크로 얼굴 가린 지금은 ‘눈빛의 시대’

눈빛의 시대
정병삼

온전한 얼굴은 이곳에선 금물입니다
지금은 눈빛의 시대 서로를 살피세요
불신이 팽배하군요 입을 가리세요

떠다니는 소리를 붙잡지 마세요
입술은 총알이 되어 우리를 겨눠요
미소가 궁금하군요 식사 한 끼 할까요

표정을 벗는다는 건 여전히 낯설어요
마음을 세우세요 눈을 크게 뜨세요
숨긴 속 보이지 않아도 자꾸자꾸 보여요

◆정병삼

정병삼

정병삼

한경대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현재 평택시청 근무.

차상

고속도로를 달리다
김재건

돌아서 갈 수 없는 생각을 부려놓고
우린 늘 앞차의 꽁무니를 보며 달리지
평원의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 누 떼처럼

둥그런 쟁반 안에 달궈진 제한 속도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액셀을 밟으면
충동은 시린 결말을 명치끝에 가져오지

상처 입은 짐승이 맹수 앞에 걸어가듯
출구를 지나친 차가 속력을 줄이고
마침내 도로에 멈춰도 生은 이미 미궁이듯

차하

배접
이정순

굴곡진 한평생을
연장통에 구겨 넣고

밥풀 먹인 무명천
생각 담은 반창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하얗게 핀 박꽃

이달의 심사평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마스크의 한 시절이 결국에는 어떻게든 끝을 보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상처와 아픔을 기록할 줄 아는 인간의 존재를 빛나게 하고 인류의 영원을 향해 가는 길이자 희망임을 믿는다.

이달의 장원에는 정병삼의 ‘눈빛의 시대’를 선했다. 시조, 시절가조는 지금, 여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마땅하다. 코로나 시대라고 통칭하는 한 시절의 삶의 모습을 “눈빛”이라는 단어 하나로 집중시킨 점이 눈길을 끈다.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는 현상을 “눈빛의 시대”라고 명명한 것은 새로운 발상이다. 여기서 “눈빛”은 중의적인 뜻을 갖는다. “불신”과 “떠다니는 소리”를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 구어체 문장으로만 끝까지 밀고 나가며 연시조 한 편을 구성하는 신인다운 패기에도 심사 점수를 조금 더 얻었다.

차상으로는 김재건의 ‘고속도로를 달리다’를 올린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행렬을 “평원의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 누 떼”로 비유한 사유의 전개가 신선하다.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 앞차만 따라가는 고속도로의 현상이 어쩌면 앞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경고하는 의미로 읽히는 작품이다. 2수, 3수 종장의 긴장이 다소 풀어지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차하에는 이정순의 ‘배접’을 뽑는다. 단수 시조는 시조의 본령이라 해도 무방하다. ‘배접’은 바느질 솜씨를 자랑하듯 깔끔하게 마무리한 단수 한 편을 선보였다. “굴곡진 한평생”에서 “하얗게 핀 박꽃”을 끌어내는 시상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삶의 긍정성이 따뜻하다.

장일경, 임정봉, 배순금(버들마편초, 같은 날)의 작품을 오래 들고 읽었다. 습작의 시간이 많을수록 좋은 작품을 빚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계속 정진하기를 빈다.

시조시인 김삼환(대표집필)·강현덕

초대시조

잎들
이우걸

삼, 사, 오월 잎들이
철모르는 소녀라면
육, 칠, 팔월 잎들이 무성한 여인이라면
구, 시월 너머의 잎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슬 맞고 비 맞고 서리 맞고 단풍도 든
세상일 다 겪어봐서 무서울 것도 없는
우리 집 아내 같은 잎을 수문장이라 불러야 할까

잎들은 그러나 마지막까지 여자라서
분홍빛 주홍빛을 온 몸에 둘렀는데
문 열고 창밖을 보니
벌써 결별의
인사를 하네.

◆이우걸

이우걸

이우걸

1946년 경남 창녕 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지금은 누군가 와서』, 사화집 『네 사람의 얼굴』, 평론집 『현대시조의 쟁점』, 산문집 『질문의 품위』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가람시조문학상·이호우시조문학상 등 수상.

흔히 사계절은 사람의 일생과 비유된다.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온갖 만물들에 탄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봄, 열정으로 가득한 청춘의 시기인 여름을 지나 생의 결실을 맺으며 서서히 물들어가는 가을, 지나온 생애를 성찰하며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겨울. 그러한 일련의 순환을 나무들은 잎을 통해 보여준다.

어느 날 시인은 생각 없이 문을 열다가 낙엽이 되어 쓸려가는 잎들을 보며 아내를 떠올린다. 그 잎들을 여성으로 환치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신고(辛苦)가 감개무량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늙은 아내가 그 잎들처럼 보였을 때 봄, 여름, 가을의 계절은 길고 긴 생애의 은유로 읽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분홍빛 주홍빛을 온몸에” 두르고 낙엽이 되어 있는 아내, 곧 “결별의 인사”를 건네고 어느 한쪽은 홀로 남아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자연스러운 통과의례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서로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이 시조의 제목은 ‘잎’이 아니고 잎들‘이 아니었을까.

앳된 소녀였고, 성숙한 여인이었던, “세상일 다 겪어봐서 무서울 것도 없는” 수문장 같은 아내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쓸쓸하게 와 닿는다.

유한하지만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유한한 인간의 삶을 이 한 편의 시조에 담아낸 시인의 저력을 다시 확인해 보는 시간이었다. 가을은 반추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손영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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