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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9월 수상작] 당장 튀어나올 듯, 한편의 강렬한 이미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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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장원〉

능소화
이영미

숨 가쁜 자드락비 기왓장에 얹히고
짓무른 볕뉘 아래 담장 넘는 유혈목이
뱉어낸 내밀한 맹독
살갗 위로 퍼질 때

제 홀로 눈이 부셔 허공을 감아 채다
목까지 떨궈 내고 더러는 손도 놓아
살포시 홀로 기울어
젖은 풍탁 울리네

◆이영미

이영미

이영미

청주시 거주. ‘에세이 문예’ 수필 등단. 시 ‘목어’로 제28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차상〉

규화목
배순금

호숫가 큰 나무가 그대로 주저앉아
매몰된 울음 속 귀진 곳을 닦고 있다
얼마나 문질렀을까 수백 년 무두질

죽어도 죽지 않는 한 목숨을 품었다가
옹이로 박혀든 그리움이 애줄 없어
우리들 눈물 강 건너 적멸의 숲 다다르니

스며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굳어진다
온몸이 돌이 되어서야 눈 뜨는 새 삶에
너의 끝 마음자리에 까치발을 세운다

〈차하〉

그릇
장일경

정형을 고수하며 틀에다 맞추자니
개미도 하나 없고 가락을 타지 않아
몇 자를 슬쩍 얹으니 파격이라 흉보네

찻잔에 달을 담고 밥그릇에 시를 심다
곡기를 끊은 사람 대하기가 죄스러워
돌아서 한눈파는 척 흘겨본다 실눈으로

애초에 담을 생각 하지를 말았어야
인물이 아닐진대 자리에 앉혔으니
잘 차린 한상이라도 돌 씹은 것 같으니

〈이달의 심사평〉

9월 장원은 이영미의 ‘능소화’로 선했다. 지금 능소화는 거의 지는 단계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담을 덮거나 나무 끝까지 올라 그 품격과 화려함을 자랑했다. 이 작품에는 거센 비가 내린 뒤 비치는 태양과 붉은 능소화와 꽃뱀이라 불리는 유혈목이가 한 데 있다.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다. “짓무른 볕뉘 아래 담장 넘는 유혈목이”가 “내밀한 맹독”을 뱉어낸 자리에 능소화는 “목까지 떨궈 내고 더러는 손도 놓아” 결국은 “젖은 풍탁을 울리”고 만다. 이 풍탁은 아찔함에 눈 멀 것 같은 화자의 내면이리라.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거기다 비 냄새의 후각적 이미지까지 한 데 모여 있다.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입체적이다. 시조의 성역이라 여기는 형식 면에서도 매우 안정적인 걸음을 딛고 있어 그 시적 역량이 단연 돋보인다.

차상은 배순금의 ‘규화석’이다. 규화석은 나무가 돌이 된 특이한 화석이다. 나무가 땅이나 물에 묻혀 죽게 되면 박테리아나 미생물 등에 의해 썩게 되는 게 통설. 하지만 빠르게 매몰되면 땅이나 물속에 침전되어 있던 광물 성분을 나무 조직이 흡수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랜 시간 후 돌로 변하는 것이다. 화자는 “죽어도 죽지 않는” 역설을 이 규화석을 통해 발견한다. 그러면서 이 원리를 “우리들 눈물”에 치환했다. “눈물 강 건너 적멸의 숲에 다다”른 사람들의 아팠던 삶에 대입한 것. 밑바닥에 닿은 후 “눈 뜨는 새 삶”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비장미를 숭고미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 시는 그러면서 깊은 시적 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차하는 장일경의 ‘그릇’이다. 시조의 형식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전통적 그릇에 현대적 사유를 담아야 하는 현대시조 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다. 시조는 정형시라 “틀”이라는 외형률을 고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너무 “틀”에만 맞추다 보면 “개미도” “가락”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몇 자”를 더해 보는데 그러니 “파격”이 되어 흉만 되었다는 것이다. 맞다. 시조는 종장 첫 구처럼 ‘반드시’ 음수율을 지켜야 하고, 종장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음절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 밀고 당기는 운용방식을 이해하고 활용해보는 위편삼절 (韋編三絕)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정성욱·조우리·신의주의 응모작들도 오래 들여다봤음을 밝히며 다음을 기대한다.

시조시인 김삼환·강현덕(대표집필)

〈초대시조〉

당신도 얼룩말입니까
김진숙

마지막 남은 잎 그마저도 사족이라
초겨울 야생의 결기 뼈마디가 굵었을
담쟁이 오래된 문답
흰 벽처럼 듣습니다

말갈기 휘날리며 달려온 시간입니까
뒤엉킨 하늘 아래 멈춰선 노래입니까
벽과 벽 기대고 사는
숨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산다는 건 목숨 건 일입니다
잡은 손 마디마디 핏줄 선 사랑입니다
당신도 말발굽 소리
들었으면 합니다

◆김진숙

김진숙

김진숙

2008년 ‘시조21’ 신인상 등단. 시조집 『미스킴라일락』 『눈물이 참 싱겁다』, 현대시조 100인선 『숟가락 드는 봄』 등. 정음시조문학상 수상.

“마지막 남은 잎 그마저도 사족이라”. 첫 문장부터 강렬하게 다가오는 어떤 결기가 느껴집니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흰 벽을 타고 넘던 “오래된 문답” 같은 담쟁이의 핏줄 선 뼈대들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과 햇빛과 비의 시간을 견뎌낸 자연은 분명 위대한 스승입니다. 담쟁이는 타 넘어야 할 흰 벽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온 힘을 다해 핏줄이 터지도록 한 발 한 발 나아갑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기에 사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야생을 달리던 말발굽 소리가 앙상하게 뼈만 남은 시간들과 겹쳐집니다.  “야생의 결기”가 느껴지는 핏줄 선 줄기를 삶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합니다.

제주의 돌문화공원에는 오백장군 갤러리가 있습니다. 그 갤러리 흰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에 깃들인 서사가 어느 날 문득 시인의 귀에 들렸겠지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온 시간”의 소리를, 지금도 달려오고 있는 말발굽 소리를, 그 의미심장한 목숨 건 사랑의 노래들을 “당신도 들었으면 합니다”라고 시인은 기원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목숨일지라도 지나온 생은 그처럼 치열했음을, 담쟁이는 핏줄 선 뼈마디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 같습니다.

시조시인 손영희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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