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7월 수상작] ‘상가 선박’ ‘열섬 항로’ 여름밤 표현 빼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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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원〉

여름밤
조성연

뜰안채 우방 화성 금류 한일 아파트호
고층 선실 불을 켜는 크루즈 출항 준비
거리의 상가 선박도 집어등을 밝힌다

열대야 강을 건너 열섬으로 잡은 항로
삶은 흘러 삼면 바다 뱃길 저어 돌아오듯
시원한 닻을 내리는 내일 아침 향해 간다

강아지풀 꼬리 젓는 저물녘 강변에서
하늘 길 등대로 뜬 달을 보고 흔들 때
바람은 상류 쪽으로 등을 밀고 있는 밤

◆조성연

조성연

조성연

경북 김천 거주. 담우미술학원 원장. 10여 년 시조 습작. 2017년 청풍명월·이은방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무화과꽃 여인
전미숙

꽃 지는 소리에도 명치끝이 아렸다
골목이 깊을수록 묻어둔 속내는
구겨서 접어둔 종이처럼
꽃물이 쉬이 배었다

버석대는 마른 가지 바람이 일 때마다
한사코 손사래 치며 "내사 괘얀타"
이생엔 꽃 없다는 듯
속울음을 삼킨다

좁은 문틈 사이로 햇살 무늬 겹주름
심지는 묻어두고 겉옷을 벗는다
꽃 아닌 기억들 저편
온 생이 꽃이었다

〈차하〉

모서리
류용곤

차갑게 시려 오는
명치 끝 비명 소리

외면의 한 귀퉁이
각이 져 날 세우다

서릿발 새하얀 뿔이
외발 세운 팽이처럼.

〈이달의 심사평〉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전통의 민족시인 시조를 빚기 위해 노력하는 투고자들과 함께 더운 여름날을 이겨내고 싶다.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는 문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이달의 장원으로 조성연의 ‘여름밤’을 올린다. 발상이 신선하고 말을 놓는 자리가 안정적이다. 초장, 중장, 종장을 풀어가는 시상의 전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거리의 상가 선박’, ‘열섬으로 잡은 항로’, ‘하늘 길 등대로 뜬 달’ 등 빼어난 표현과 더불어 시조의 정형과 리듬을 익힌 솜씨가 믿을 만하다. ‘시원한 닻을 내리는 내일’을 향해 가는 삶의 눈길이 긍정적이다. 누구라도 무더운 여름밤을 보내는 일이 쉽지 않지만, 크루즈 출항을 준비하는 고층선실 아파트호를 상상하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차상으로는 전미숙의 ‘무화과꽃 여인’을 선한다. 무화과꽃으로 표상되는 한 여인을 그리고 있다. 꽃이 없는 열매를 의미하는 무화과는 신산한 삶을 묘사하는 예가 많다. ‘내사 괘얀타’와 ‘속울음’은 동일한 삶의 ‘기억들 저편’을 의미한다. ‘무화과꽃 여인’은 묵직한 내용을 다루기엔 버겁고 모호한 표현이 없지 않지만, 신인답게 ‘꽃 아닌 꽃’이라는 주제를 밀고 나가는 과감한 시도를 높이 샀다.

차하에는 류용곤의 ‘모서리’를 뽑는다. 모서리가 상징하는 ‘비명’, ‘날’, ‘뿔’, ‘팽이’ 등이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한다. 장과 장을 건너는 상상의 진폭이 크다. 오랜 기간 작품을 갈고닦는 솜씨가 엿보이긴 하지만, 독자와의 공감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다.

오영록, 배순금의 작품을 오래 읽었다. 언제라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실력이 충분하다. 계속 도전하기를 빈다.

시조시인 김삼환(대표집필)·강현덕

〈초대시조〉

민달팽이
김주경

별을 본다는 건 하늘을 본다는 것
하늘을 본다는 건 고개를 들었다는 것

잘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바닥만 섬겼을까

직립을 배우지 못해 생은 자꾸 흔들리고
처세술도 모른 채 곧추세운 두 개의 뿔

맨발로 걸어온 문장만이
첨삭 없는 자서였다

◆김주경

김주경

김주경

경남 밀양 출생. 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등단. ‘서정과현실’ 신인상. 2015년 아르코 문예창작기금 수혜. 시조집 『은밀한 수다』.

시인이 만든 시적 풍경이 암담하다. 연체동물로 태어나 바로 서지 못하고 바닥만 기어가는 민달팽이, 그러나 두 개의 뿔을 자존감인 양 곧추세우고 한발 한발 내딛는 민달팽이의 힘찬 기개가 엿보여 또한 희망적이다.

어느 회사의 면접 담당자가 면접을 보러 온 청년에게 “민달팽이 님, 언제 출근 가능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달력에다 “민달팽이 출근”이라고 써 놓았다는 글을 인터넷 검색하다 보게 되었다. 하지만 글쓴이는 교대근무에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과 일의 강도가 너무 센 그 회사에 합격이라는 문자가 오자마자 정중히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비록 첨삭 없는 자서 뿐이지만 청년들이여 가끔은 고개를 들어 ‘별’을 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하늘’을 보아야 한다. 우리 앞에 ‘바닥’만 놓여있는 것 같지만 눈을 들어보면 무수히 많은 반짝이는 별들과 호수만큼 깊고 넓은 푸른 창공이 펼쳐져 있다.

“첨삭 없는 자서”나 “맨발”이 은유하는 이 땅의 많은 민달팽이들, “왜”라는 시어 하나에 응축돼 있는 의미가 남다르게 가슴에 와 콕 박히는, 그래서 “잘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바닥만 섬겼을까” 라는 시인의 일설이 아프지만 희망적이다.

손영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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