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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이 묻는다, 시스템은 정당한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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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20면

재수사

재수사

재수사
장강명 지음
은행나무

대문호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150년 전 소설 『죄와 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나. 악덕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 살해한 소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서다.

21세기 한국 작가 장강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아니 근대국가의 형사사법시스템은 문제다. 『죄와 벌』처럼 두터운, 200자 원고지 3000쪽 분량의 새 장편소설 『재수사』에서 그런 문제를 파고들었다.

무전유죄, 인권 유린 같은 사회구조나 제도의 허점을 문제 삼은 게 아니다. 오히려 죄형법정주의를 겨냥했다.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성문 법률이 있어야 한다는 대원칙 말이다.

소설 속 살인범은 이를테면 확신범이다. 자신의 살인행위가 충분히 정당했다고 믿는다. 추가 살인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다. 살인범이 보기에, 자신이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근대 형사사법시스템이 뿌리 내리고 있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착각 때문이다(이야기는 거창해진다). 신의 시대였던 중세를 밀어내고 득세한 계몽주의가 외골수로 치달은 결과 생명과 자유, 평등, 행복추구권 같은 개인의 복리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제한 없이 보장하자는 세상이 됐지만 그러다 보니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다는 논리다. 살인범은 믿는다. 나는 살인을 저질러도 큰 벌을 받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내가 죽인 사람으로부터 살인 행위 이전에 입었다. 그러니 나의 살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가벼운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현재 성문법은 이런 대목이 빠져 있어 큰 문제다.

두 권짜리인데 이런 얘기라니. 손님 떨어질지 모르겠다. 장강명의 이번 소설은 그런 표현이 있다면 ‘사회과학 소설’인가. 범죄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다. 거칠게 얘기하면 절반은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치명적인 미모의 연세대생 민소림이 자신의 신촌 원룸에서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다. 하의는 벗겨진 상태였고 정액이 검출됐다. 대중의 호기심이 미쳐 날뛸만한 소재다. 거대 인력이 투입된다. 1000명이 넘는 관련자 조사가 이뤄진다. 2000년 8월의 일이다.

장강명은 22년 전 살인 사건 재수사(소설의 기준 시점은 2022년 지금이다)와 살인범의 내면 묘사 사이의 기계적인 균형에 공을 들인다. 전체 100개의 챕터 가운데, 홀수 챕터는 살인자, 짝수 챕터는 재수사에 할애했다.

이렇다 보니, 아니 그래서, 독자는 이중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범죄소설의 장르적 재미가 긴장감 넘치는 각종 우여곡절을 거쳐 최대치로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 살인은 과연 정당한가라는 도덕론적, 가치론적 문제 제기가 화려하게 인문학으로 가지치기해서 허영심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교양 욕구가 한껏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 두 가지 갈라지는 유혹 말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은 절반의 성공인 것 같다. 산뜻한 표지 디자인은 달리 말하고 있지만, 범죄나 장르소설이리라는 치우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재수사보다 ‘재(再)탐문’이라는 취지를 전달하는 어떤 제목이 있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 탐문의 대상은 최대다수 최대의 행복 추구를 위해 줄기차게 달려온,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복합체가 그간 놓친 건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 우리의 발전 경로일 것이다. 범죄소설이라는 선입견을 떼고 봐야 소설 안에 들어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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