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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브레인 딸' 암살범 지목된 女요원…우크라 "크렘린의 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마리아 두기나의 장례식 도중 아버지 알렉산드르 두긴(왼쪽)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AP=,연합뉴스

2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마리아 두기나의 장례식 도중 아버지 알렉산드르 두긴(왼쪽)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AP=,연합뉴스

'푸틴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 마리아 두기나(30) 암살 사건과 관련해 22일(현지시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사건 용의자로 우크라이나 군부대 출신의 나탈랴 보우크(43)라는 여성을 지목했다. 지난 20일 오후 모스크바 외곽 고속도로에서 차량폭발로 두기나가 사망한 지 이틀 만이다. 외신들은 FSB가 수사 착수 하루 만에 용의자의 신원을 공개한 점과 우크라이나 비밀요원이 러시아 국경을 그렇게 쉽게 드나들 가능성이 작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이 이날 발표를 못 미더워한다고 전했다.

텔레그래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FSB는 이번 차량폭탄 사건을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준비하고 실행했다"고 주장했다. FSB는 용의자인 보우크가 우크라이나 아조우(아조프) 연대 출신이며 사건 직후 에스토니아로 떠났다고 밝혔다고 가디언이 보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극우주의 단체로 여기는 아조우 연대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합병 때 민병대에서 출발해 현재 정규군으로 편성됐다.

FSB의 수사 발표에 러시아에선 극우주의자들의 보복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마가리타 시모얀 러시아 국영 RT 편집장은 트위터에 "살인자가 에스토니아에 있다"며 "(러시아 정보당국이) 팀을 에스토니아에 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자바로프 러시아 중진 의원은 에스토니아가 보우크를 넘겨주지 않을 경우 "에스토니아에 강경한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며 갈등이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 20일 차량 폭발 사고로 사망한 러시아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 마리아 두기나.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일 차량 폭발 사고로 사망한 러시아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 마리아 두기나. 로이터=연합뉴스

반면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날 "두기나가 그렇게 (암살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며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아조우 연대 역시 "보우크와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며 "(러시아의 이런 주장은) 아조우 대원의 재판을 앞두고 여론을 조장하려는 속임수"라고 맞섰다. 또 크렘린궁이 오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에 맞춰 '쇼'를 연출할 구실을 찾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탐사보도매체 벨링캣의 크리스토 고로제프는 지난 4월 러시아 해커들이 나탈랴 보우크가 우크라이나군 소속이라는 점을 알아내 '신상 공개' 사이트에 이를 올렸다고 전했다. 그는 이미 신원이 노출된 보우크가 "그렇게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흔적을 남기며 러시아에 들어갔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앞서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보좌관도 SNS에 "러시아의 주장은 허구의 세계에나 있는 이야기"라며 "러시아 내부 권력 다툼에서 벌어진 일"라고 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고가 러시아 내부 레지스탕스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때 러시아 두마 의원으로 지금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반체제 정치인 일리야 포노마레프는 지난 21일 차량폭발의 배후가 반(反)크렘린 세력인 '국가 공화국군(NRA)'이라며 "러시아 내부에 만연한 푸틴주의에 대한 저항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NRA 관련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고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NYT는 FSB의 신속한 발표와 복수에 대한 뜨거운 요구는 러시아 내 강경파의 목소리가 확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이날 보도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6개월을 맞아 국내 정치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전쟁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사망한 두기나에게 '용맹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밝혔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사건의 배후가 우크라이나라는 FSB의 주장에 대해 "러시아가 이를 조사할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가 특정 결론을 제시할 것"이라며 "여기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우크라이나가 어떤 개입도 부인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유엔도 이례적으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마리아 두기나는 아버지의 사상을 이어받아 반자유주의적 '러시아 제국'의 확장을 주장한 정치철학자로 매스미디어를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서방의 제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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