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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엔 학교서 못 배운 역사 담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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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나봉주씨는 취미로 모은 우표 1만여 장 중 약 5000장을 추려 우표 역사책인 『체부』를 펴냈다.

나봉주씨는 취미로 모은 우표 1만여 장 중 약 5000장을 추려 우표 역사책인 『체부』를 펴냈다.

“처음엔 우표 도감을 만들 생각이었어요.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우표에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우리 근대사가 배어 있더라고요.”

취미로 우표를 모으다 1200쪽이 넘는 우표 역사책까지 쓰게 된 나봉주(75)씨는 4일 “편지와 우표가 사라지는 현실이 아쉽지만 그런 변화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표에 얽힌 생생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는 것.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체부』(박영사)를 쓴 이유다.

조선 최초 우표인 ‘문위 보통우표’. 일본에서 인쇄해 들여왔다. 갑신정변 이전 국내에 들어와 3일가량 유통됐다. [사진 나봉주씨]

조선 최초 우표인 ‘문위 보통우표’. 일본에서 인쇄해 들여왔다. 갑신정변 이전 국내에 들어와 3일가량 유통됐다. [사진 나봉주씨]

책 제목 ‘체부(遞夫)’는 달리는 사람, 우편집배원을 뜻한다. 나씨의 『체부』에는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보통우표 등 5000여 점의 우표가 소개돼 있다. 15년간 수집한 1만여 종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그런데 문위보통우표는 국내에서 인쇄된 게 아니었다. 우정총국이 설립됐지만 정작 인쇄시설이 없었다. 일본에서 찍어 들여왔다. 그나마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늑장 배송하는 사이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이 터져서다.

국내에서 찍은 첫 우표는 1900년 이화보통우표다. 나씨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창경궁 앞 인쇄소에서 찍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때까지도 국내에 인쇄기계도 기술자도 없었지만, 독일에서 기계를 사 오고 일본에서 기술자를 데려온 끝에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표 도안은 화가 지창환(1851~1921)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5년 한일 통신협정으로 통신권을 일제에 뺏긴 뒤에는 일본 당국이 우표를 발행해 유통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찍어낸 이화보통우표. [사진 나봉주씨]

국내에서 처음으로 찍어낸 이화보통우표. [사진 나봉주씨]

나씨는 “잘못 제작한 ‘에러 우표’도 귀한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낱장으로 뜯을 수 있게 뚫어놓은 구멍과 인쇄 영역이 맞지 않아 정상적으로 쓸 수 없는 우표가 에러 우표의 한 사례다. 그에 따르면, 보통 50~100만장을 찍어내는 정상 우표에 비해, 에러 우표는 많아야 1만장 인쇄된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나씨는 부품 소재 사업을 한다. 해방 직후 9남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형을 따라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우표를 샀다. 당시 체신부 산하 체성회에 가입해 월회비를 내면 새 우표가 발행될 때마다 집으로 보내줬다고 한다. 처음 수집한 우표는 국악기 시리즈였다.

이후 학업과 사회생활을 하며 한동안 우표 수집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삶에 여유가 생기자 곧장 우표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해외 수집가가 우리 우표를 수집한 경우도 많아 이베이 같은 해외 경매 사이트를 자주 뒤진다. 그간 우표를 사 모으느라 쓴 돈이 15년간 10억원가량이라고 했다. “사업으로 돈 벌고 여행 가고 세금 내며 살던 사람이 우표를 모으고 우표 역사를 정리하면서 애국자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정가 12만원인 책 1000권을 자비로 찍었고, 지금까지 도서관·대학 등에 등 600권을 기증했다. 나머지도 모두 기증할 생각이다.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조선 총독부 관보 17만 2510건을 6개월간 샅샅이 훑어 워드로 정리한 ‘일제강점기 전국 우편국 명단’이다. 출력한 문서를 쌓으니 높이가 30㎝가 넘었다고 한다. 이를 요약한 표도 깨알 같은 글씨로 22장에 달했다. 나씨는 “경기도 양평에 ‘체부 박물관’을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듯, 젊은이들이 우표를 통해 우리 역사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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