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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간 전쟁의 비극 계속 맴돌아, 서울 발전해 눈물 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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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호 06면

6·25 72주년, 한국 찾은 노병들 

23일 엠버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한국전쟁 72주년을 맞아 초청된 캐나다군 참전 용사들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존 마이클 몰나르, 로날드 존 포일, 켈리 에이 왓슨. 전민규 기자

23일 엠버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한국전쟁 72주년을 맞아 초청된 캐나다군 참전 용사들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존 마이클 몰나르, 로날드 존 포일, 켈리 에이 왓슨. 전민규 기자

“서울 교통체증에 눈물이 다 났다. 한국이 이렇게나 발전했다는 모습이니까.”

태양이라도 삼킬 듯, 혈기왕성했던 17세 소년은 저물어 가는 해처럼 앙상한 낯빛의 88세 노인이 돼 한국을 다시 찾았다. 캐나다인 로널드 존 포일은 “지난 70여 년간 내 머릿속에는 한국과 전쟁, 그리고 비극이라는 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고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긴장과 흥분으로 그의 손은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손에 쥔 물잔 속의 물이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72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란 민족의 격랑이 일었다.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든 유엔군 및 교포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지난 23일 오전 3명의 캐나다 참전용사들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정복을 차려입고 나선 빅터 찰스 로버트 플레트(94), 존 마이클 몰나르(92), 로날드 존 포일(88)씨다. 그들은 “한국의 초빙에 놀랍고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참전용사에 새로운 제복 지급

한국전쟁 당시 23세에 구축함 크루세이더에서 근무한 플레트씨는 북한·중국·소련 해군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크루세이더 함은 4대의 북한 열차를 폭파시키며 ‘트레인 버스터(train buster)’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캐나다군 2만6000여 명 중 500여 명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모두 한국을 내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싸웠는데, 함께 캐나다 땅을 다시 못 밟은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플레트씨는 또 “여자친구와 헤어져 홧김에 자원입대해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는데, 한국을 위해 헌신한 내 모습에 여자친구가 마음을 돌려 결혼했고 이후 50년을 함께 했다”고 말했다.

몰나르씨는 “전사한 500여 명의 동료에게 미안함을, 잘 지켜낸 한국이 몰라보게 발전했음에는 고마움을 표한다”고 밝혔다. 그는 1950년 7월 한국 해역에 참전한 최초의 캐나다 구축함 케요가에서 해군 선원으로 근무했다. 몰나르씨는 “한국전쟁이 한참 지나서야 태어난 젊은 한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니, 되레 우리가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이라고 전했다.

몰나르씨와 같은 배에서 근무한 존 포일씨는 창밖의 서울 도심을 계속 살피며 “내 젊음이 헛되지 않았구나”란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떨어지지 않으려 부둥켜안고 있는 한국 가족들을 북한에서 서울로 이송했던 일인데,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참 궁금하다”며 “오늘은 내가 한국의 도움으로 여기에 왔으니…생큐”라고 말했다. 전역 후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는 존 포일씨는 현재 캐나다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메모리 프로젝트(Memory Project)’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며 “전쟁의 비극, 나라의 중요함을 젊은 학생들이 배움으로써 우리 사회의 연대가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6·25전쟁 72주년 행사에는 총 9개국의 유엔참전국 참전용사와 가족 등 41명, 해외에 거주 중인 교포 참전용사와 가족 등 19명이 참석한다. 23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행사가 진행되며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영웅들을 모십니다’라는 주제로 열린다.

국가보훈처가 ‘제복의 영웅들’이라는 프로젝트로 제작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여름단체복을 입은 참전용사들. [사진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가 ‘제복의 영웅들’이라는 프로젝트로 제작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여름단체복을 입은 참전용사들. [사진 국가보훈처]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낮 서울 중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유공자와 오찬을 함께 했다. 윤 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유엔 참전용사(9개국, 총 12명)와 해외에 거주 중인 교포 참전용사(13명) 등 25명이 함께 했다.

초청자 중 최고령자는 호주인 제럴드 셰퍼드(96)씨다. 그는 1952년 6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호주 해군의 이등병 선원으로서 해주만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부부 참전용사도 한국을 찾는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 중인 교포 이천봉(95)씨와 간호장교로 참전했던 아내 노재덕(91)씨다.

캐나다 군사학교 생도로 재학 중이면서 한국 육군사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체류 중인 제이컵 트렌터(21)씨도 이번 행사에 합류했다. 그의 증조부인 고(姑) 조지 트렌터는 1951년 10월 355고지 전투(고왕산 전투)에서 전사해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제이컵 트렌터 생도는 “캐나다 무관이 돼 증조부가 목숨 바쳐 지켜낸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 20일에는 유엔 참전용사 고(姑) 존 로버트 코미어의 유해가 고인의 의지에 따라 인천국제공항으로 봉환돼 부산에 안장됐다. 코미어씨는 19세에 캐나다 육군으로 1년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사망 직전 동생을 통해 “동료들이 있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굳은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와 예우를 담은 새로운 단체복이 지급되었다. 이 단체복을 입은 참전용사들이 지난 21일·22일에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시구와 시축에 나섰다.

“정부, 국가유공자에게 더 신경써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손희원 회장(89)은 “전쟁에서 힘을 합쳐 나라를 지켜냈던 그때처럼 지금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새 제복을 입고 인천유나이티드의 시축자로 나선 김기제씨는 “용문산전투와 북한강전투에서 많은 동료들을 잃었는데, 지금도 후배 군인들을 보면 그때 기억이 난다. 그들이 우리의 편안한 일상을 지켜주는 것에 감사하다”고 밝혔다.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춘천여고에서 학도병 출신으로 참전한 정기숙(88)씨도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기억한다. 정씨는 최전방 뒤에서 따라가며 피난민들을 위한 안내 방송을 하고 피난 포스터를 붙였다고 한다. 정씨는 “1·4 후퇴 당시 중공군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남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며 “어느 날은 어두운 밤에 골짜기를 걸어가는데 발에 뭐가 밟혀서 봤더니 전사한 국군들의 시체였다”고 당시 참극을 설명했다. 그는 또 “내가 참전용사로 국가 유공자에 등록되었다는 것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모르고 살아왔다”며 “주변에 나 같은 학도병, 소년·소녀병 출신 참전용사 중에 자신이 국가유공자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정부가 그런 분들에게 더 신경 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은하고 싶어” 학도병 아들, 참전 에티오피아에 12년째 기부

이규원(오른쪽) 원장은 12년째 에티오피아에 1000만원씩 기부하고 있다. [사진 이규원]

이규원(오른쪽) 원장은 12년째 에티오피아에 1000만원씩 기부하고 있다. [사진 이규원]

“잘 전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라며 쑥스러워했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는 이규원(60)씨는 지난 2일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 월드투게더에 1000만원을 기부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에게 보내달라면서다. 올해로 12년째 매년 1000만원씩 한국전쟁 참전 군인을 위해 기부했다. 이씨는 “생면부지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은하고 싶은 마음일 뿐”이라며 웃었다.

이씨의 특별한 기부는 12년 전 우연히 듣게 된 참전군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1951년 에티오피아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황실 근위병을 중심으로 한 지원군 6000여 명을 한국에 보냈다. 이들 중 120여 명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종전 이후 시간이 흘러 퇴역군인이 됐고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300여 명이 생존해있는데 대부분이 형편이 넉넉지 않다고 한다.

이씨는 뉴스에서 들은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 이경종(88)씨가 떠올라서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중학교 3학년 때 군복을 입고 총을 들었다. 3년간 사선을 넘나드는 동안 곁에 있던 전우 수백명이 죽거나 실종됐다고 한다. 평소 아버지의 아픔이 안타까웠던 이씨는 이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군인에 대한 보답을 결심했다. 그는 “에티오피아에선 5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4만원”이라며 “내가 1000만원을 보내면 20가구가 1년간 편안히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국의 참전 군인에 관심을 가지면서 국내 학도병 문제에도 더 진지해졌다. 평소 아버지를 비롯한 학도병이 제대로 예우받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진료 사이사이 시간을 쪼개 학도병 재조명 작업을 시작했다. 전국에 흩어진 아버지의 옛 전우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녹취했다.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치과 건물 1층에 ‘인천 학생 6·25 참전관’을 열었다. 운영비로 매년 8000만원을 쓰지만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간 수집한 학도병의 이야기를 엮은 『인천 학생 6.25 참전사』도 펴냈다.

최근 이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학도병들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진실과화해위원회에 요청했다. 당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전선에 남아야 했던 소년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들이 공적에 적합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아버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이 나라 양지바른 곳에 전사한 내 친구들 이름만이라도 돌에다 새겼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분들을 위해 기부와 학도병 연구를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어느덧 ‘학도병 지킴이’란 호칭이 익숙해진 치과의사의 간절한 소망이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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