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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왜 대중의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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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협소한 지식으로 감히 미술작품을 논하는 불경스러움을 탓할지도 모를 일이다. 감내하고 말하자면 20세기 미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초상화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500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랐다. 공개 경매 방식으론 20세기 미술작품의 가격 중 최고가다.

꼰대로 규정되기 쉬운 나이에 접어드는 동안 미술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겼다. 예술은 이해하려면 숙성된 시간이 필요하고, 이는 소수 사람만의 가치평가라 생각해왔다. 미술은 대중이 향유하기에는 너무도 엄숙하며 권위가 깃든 특권층의 전유물이라는 경외심에 포박당해온 것이다.

갈수록 가치 높아지는 팝아트
순수·대중예술 구분 의미 없어
대중이 좋아하는 게 좋은 예술
코로나 시대, 동네병원 살려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미술작품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인식 오류는 역사적 산물의 영향과 교육 때문이리라. 도통 이해하기 힘든 미술작품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이들은 대중의 기호에 부응하는 앤디 워홀식의 미술작품을 천박한 욕망으로 바라보던 비판적 입장을 취했고, 또 이에 과잉동조 된 것이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설명 없는 대가들의 초상화보다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초상화는 대중에게 더더욱 살갑다. 우리 국민이 사랑하는 박수근 화백은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주문받은 초상화로 생활고를 해결하면서 후대에 명작을 남겼다. 이렇듯 화가들에게 작품이 밥이 되고 생활이 되는 것이다. 굳이 작품의 주제에 고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겠지만 앤디 워홀의 팝아트 이전의 미술은 대중의 수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중세의 종교화·초상화 등도 모두 대중적인 수요가 존재했기에 발전해 왔고 그 수요는 미술의 역사가 됐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술과 대중은 그리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며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문화로 작동한 것이다. 익숙한 것들의 가치라 아니 할 수 없다.

대중예술인인 방탄소년단의 병역 특례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불붙기 시작한 저간의 배경에도 대중문화와 예술의 획일적 구분이 자리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도 개념미술로서의 현대미술은 여전히 난해하다. 미술에 대한 대중적 몰이해는 미술 발전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대중 친화적이지 않은 미술이 어찌 경쟁력을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문화 소비자인데 말이다.

우리의 입시 지상주의의 교육과정에서 미술교육은 경시돼왔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아예 미술 교과를 진행하지 않는 학교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러한 교육 형태는 예술적 경험의 기회를 박탈하고, 익숙하지 않은 예술에 대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만들어 냈다.

분명한 사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술이다.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작품에 대한 자본적 가치가 이를 입증한다. 대중의 수요에 따른 평가이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작품 대량 생산의 망설임이 없었으며 가격 또한 저렴해서 많은 이들에게 팔렸다. 당시에는 천박한 미술로 경시 받았지만 사후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됐다. 순수예술의 예술적 가치를 뒤흔든 것이다. 가장 대중적이며 누구나 소비 가능한 문화가 예술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선민의식과 일부의 전유물로 존재하던 예술의 영역을 대중의 영역으로 이끌고 상업성과 작품성을 획득한 앤디 워홀. 누구도 자유롭지 못할 일상의 욕망이 순수미술 속으로 유입됨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이분법적 위계 구조를 해체한 그였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예술을 선도한 팝아트는 그렇게 익숙한 것들의 가치로서 재평가됐다.

의료의 공공성은 우리 사회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성질이다.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보듬기 위해 의료만큼 공공성을 갖는 분야도 없다. 공공성은 대중성이다. 나라의 곳간을 고려해 의료의 많은 부분을 민간 의료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간 의료에 의료의 공공성만을 강요하기에는 설득과 소통의 힘은 부친다. 마치 순수예술의 가치만을 주창하던 유럽 초기의 미술사조와 다를 바 없다.

반드시 가야 할 의료의 공공성과 대중성을 얻고자 한다면 익숙한 것들부터 살펴봐야 한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지방의 동네병원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바이러스의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대중과 호흡하고 싶었던 앤디 워홀도 그랬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