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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결혼식, 유튜브로 볼까 직접 갈까…이젠 세미택트의 시대 [호모 코로나쿠스 下]

중앙일보

입력

30년간 미용실을 운영한 윤상희씨(가명·50대)는 최근부터 예약 손님만 받기로 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은 그의 미용실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아파트 상가 한쪽에 위치한 창문 없는 미용실에서 코로나19를 온몸으로 겪은 뒤 윤씨가 내린 결정이다.

미용 의자 2개만으로 꽉 차는 33㎡(약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염색 손님이라도 받은 뒤면 눈이 따가워져서 문을 활짝 열어둬야 하는 삶이었다. 코로나에 감염된 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손님은 뚝 끊겼고, 저도 확진돼 많이 아팠어요. 역병 앞에선 다 소용없는데 이렇게 살면 뭐하나 싶더라고요. 잃어버린 제 삶을 찾고 싶었어요.”

이제 그는 남는 시간은 자신에게만 쓰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글쓰기·볼링 등 관심 있던 일들을 배운다. 윤씨는 “경제적 여유가 줄어들어도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출근을 하고 있다. 뉴스1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출근을 하고 있다. 뉴스1

코 박고 일만 할 순 없다

윤상희씨도 호모 코로나쿠스의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난 뒤 기존의 관습을 재설정했다. 삶이나 가치관을 ‘리포메이션(reformation·재정립)’ 한 그들은 더 나아가 “코로나19 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인류의 가치관에 변곡점을 가져왔다. '퍼스널 스페이스', '세미택트', 'WANT→LIKE'로의 변화가 대표적인 가치관 변화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코로나19는 인류의 가치관에 변곡점을 가져왔다. '퍼스널 스페이스', '세미택트', 'WANT→LIKE'로의 변화가 대표적인 가치관 변화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직장인 안모(54)씨는 코로나19를 거치며 퇴직을 결심했다. “감염병으로 전 세계에서 600만명이 죽는 걸 보며 내린 결정”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안씨는 “내년에 내가 살아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데, ‘코 박고 일만 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고도 했다. 그는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지금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지금 만나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고 덧붙였다.

공무원 장모(48)씨는 “일이 아닌 가족에게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시대를 이렇게 승화시키고 있었다. “승진이 중요한 시기라 코로나19로 사회생활에서 손해 본 게 많지만, 후회는 없어요.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이때만큼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요.”

적당한 거리에서 행복을 느끼다

15일 오전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한 시민이 출근길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뉴스1

15일 오전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한 시민이 출근길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뉴스1

호모 코로나쿠스는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개인적 공간)’를 찾아 나서고 있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높아진 위생 관념, 익숙해진 거리 두기가 그런 습관을 만들었고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취업준비생 김모(27)씨네 식탁에는 최근 커다란 집게가 생겼다. 큰 그릇에 국과 반찬을 두고 함께 먹었던 예전과 달리 코로나19로 음식을 덜어 먹는 습관이 정착됐다. 김씨는 “모두가 음식을 공유했던 과거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예전에는 ‘가족끼리 뭘 그런 걸 신경 쓰냐’며 유난스럽게 여겼지만, 이제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눈치 보지 않고 내 공간을 보장받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했다.

직장인 박모(27)씨는 “퍼스널 스페이스의 보장이 감정 소모와 사생활 침해를 줄여줬다”고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악수 같은 스킨십을 하지 않고, 상사들도 팀원을 대할 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니 훨씬 편하다”면서다. 특히 MZ세대가 “코로나19로 생긴 개인 공간이 소중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씨는 “예전에는 상대가 선을 넘어 내 구역으로 마구 침범하고는 했다”며 “드디어 가지게 된 적당한 거리를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언택트와 콘택트 사이, ‘세미택트’

지난 2020년 4월 4일 온라인으로 하객을 초대한 신랑과 신부가 서울 강남구 소재 예식장에서 ‘유튜브 라이브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20년 4월 4일 온라인으로 하객을 초대한 신랑과 신부가 서울 강남구 소재 예식장에서 ‘유튜브 라이브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회사원 윤종민(37)씨는 지인 결혼식 때마다 유튜브 영상으로 볼지, 아니면 직접 축하하러 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윤씨는 “언젠가부터 비대면 옵션을 자연스럽게 고려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컨택트’할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게 됐다”고 했다. 직장인 서모(27)씨는 “친구들과 만날 때 시간이 애매하면 약속을 몇주씩 미뤘는데 이제는 미루지 않고 줌(zoom)으로 만난다”고 말했다.

팬데믹 속의 탈출구였던 비대면의 삶은 이제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 ‘반도체(Semiconductor)’의 특성처럼 거리낌 없이 ‘대면’과 ‘비대면’을 오갈 수 있다. ‘세미텍트(대면과 비대면의 공존)’의 자유를 갖게 된 것이다. 『K를 생각한다』를 쓴 임명묵 작가는 “원격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이 대대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대면이 선택지가 된 것은 큰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원격을 선호하는 이들은 앞으로도 원격이 가능한 조건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라고 짚었다.

사회적 원트(WANT) 대신 나만의 라이크(LIKE)

1월 13일 서울 종로구 CGV피키다리 1985 내 스포츠 클라이밍짐 'PEAKERS(피커스)'에서 고객들이 클라이밍을 즐기고 있다. 뉴스1

1월 13일 서울 종로구 CGV피키다리 1985 내 스포츠 클라이밍짐 'PEAKERS(피커스)'에서 고객들이 클라이밍을 즐기고 있다. 뉴스1

호모 코로나쿠스의 ‘가치의 척도’는 이전 세대와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코로나 사피엔스』의 공저자인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사람들은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한 ‘원트(WANT·사회적인 욕망)’의 사이클을 돌았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라이크(LIKE·자아와 관련된 욕망)’가 뭔지 알게 됐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자신을 위한 레저·문화·예술·취미 등에 대한 수요는 이미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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