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창규의 시선

경제 약자 울리는 인플레이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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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헨리 8세(재위 1509~1547년)의 시기에 잉글랜드는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목격자에 따르면 거지가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도덕은 화폐만큼이나 타락했다. 뭔가 옳지 않다는 느낌은 1590년대 금융 위기, 사회 불안, 전쟁으로 휩싸였던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2년 전 물가 상승을 분석하는 글에서 1500년대 유럽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러면서 이런 혼란의 근본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고 진단했다. 이전 300년간 유럽의 물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1500년 이후 잉글랜드의 물가는 50년 만에 두 배나 뛰었다. 이탈리아 물가는 연평균 5%씩 올랐다. 인플레이션으로 사회와 정치는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흑사병이 대유행한 뒤 인구는 급속도로 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나왔다. 이 때문에 식료품에 대한 수요는 늘었는데 농사지을 사람은 줄었다. 일부 국가에선 전쟁, 궁전 건설 등에 쓰기 위해 다른 금속과 섞은 주화를 마구 찍어댔다. 여기에 더해 남미 볼리비아에서 거대한 은 매장지가 발견돼 스페인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통화량이 크게 느니 물가가 폭등했다. “스페인에서는 은 빼고 모든 게 비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임금인상이 물가상승 못 따라가
경제 약자의 지갑 갈수록 얇아져
인플레이션에 정치 사회 불안정

1500년대 이야기를 꺼낸 건 요즘 인플레이션이 심상치 않아서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다. 여기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원자재 수급 불안 등이 겹치며 물가가 널뛰기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식품과 생필품값까지 다락같이 오르고 있다. 한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2022년 5.1%, 2023년 3.6% 상승했다. 올해 들어서도 1월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 올랐다가 2·3월에도 3.1%씩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심각한 건 서민 가계와 직결된 신선식품 값이 급등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선식품지수는 1월에 전년 동월보다 14.4% 올랐고 2월엔 20%, 3월엔 19.5%나 뛰었다. 특히 3월에는 신선과일이 40.9%나 폭등했다. 정부는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부진, 저장량 감소 등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서민은 ‘올라도 너무 오른다’며 울상이다.

고삐 풀린 물가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부 눈치를 보던 많은 기업이 총선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식료품 등의 가격을 올리고 있다. 초콜릿·과자·아이스크림부터 치킨·김밥·버거까지 거의 전방위로 가격 인상 러시가 벌어지고 있다. 세계 기준으로도 한국의 인플레이션은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월 한국의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상승률은 6.95%로 OECD 평균치(5.32%)를 훌쩍 넘어섰다. 통계가 집계된 35개 회원국 가운데 튀르키예(71.12%), 아이슬란드(7.52%)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미국도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탓에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가능성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 올라 2월(3.2%)은 물론 전문가 예상치(3.4%)를 웃돌았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면 가장 고통받는 계층은 경제 약자다.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빈곤층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소득이 제한돼 있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앨리스’(ALICE·Asset Limited, Income Constrained, Employed) 계층이 전체 가구의 29%에 달했다. 이 비율은 지난 10년간 계속 증가했다. 임금 인상 속도가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주택 가격을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물가 수준을 반영한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355만4000원으로 전년보다 1.1% 감소했다. 2022년 사상 처음으로 연간 실질임금이 줄어든(-0.2%) 데 이어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은 올해 더욱 가팔랐다. 1월 실질임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1% 급감했다. 소득이 줄어드니 저소득층은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지난해 4분기에 전체 가구 중에서 소득 하위 20%만 지출을 줄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소득보다 지출이 많아 월평균 29만1000원의 적자 살림을 해야 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사전트 뉴욕대학교 교수는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세금”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화폐 발행 효과에 따라 ‘세금’ 여부는 달라지겠지만 분명한 건 인플레이션이 소득을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특히 살림살이가 빠듯한 저소득층에게 다가오는 충격이 크다.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면 삶의 질 저하, 그 이상의 고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