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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높이 자유자재, 쓰는 사람이 완성하는 램프 예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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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호 26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테이블 램프 ‘티지오’

각도와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티지오’ 테이블 램프는 쓰는 사람이 형태를 만들어가는 예술품과 같다. [사진 윤광준]

각도와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티지오’ 테이블 램프는 쓰는 사람이 형태를 만들어가는 예술품과 같다. [사진 윤광준]

책상 위에 티지오(Tizio)를 놓았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평소 쓰던 스탠드 조명은 밝기를 바꿀 수 없는 LED 타입이었다. 일부러 전구 색 LED를 썼지만 불빛의 질은 무엇인가 빠진 듯했다. 바뀐 조명등은 밝기가 조절되는 할로겐전구의 따뜻한 불빛이 도드라진다. 조명등은 광질이 중요하다. 수치로 표시하자면 2700°K 언저리로 비슷한 LED와 할로겐램프의 불빛은 느낌이 다르다. 할로겐램프는 백열전구와 같이 필라멘트를 달궈 빛을 낸다.  따스한 느낌의 빛 에너지가 모이는 듯한 느낌이다. 밀도로 치면 조밀한 상태랄까. 반면 요즘 대세인 LED는 부드러운 대신 빛의 밀도가 성글다.

티지오를 지금까지 갖고 있는 이유는 할로겐램프가 내는 불빛의 느낌 때문이다. 혹시 생산이 중단되더라도 쓸 수 있도록 여분의 오스람 전구를 몇 개나 쟁여놓았다. 할로겐램프의 불빛은 매력적이다. ‘강렬하고 부드럽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반된 특성으로 어둠을 밝히고 사물의 또렷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심코 놓아본 티지오는 잊고 있었던 필라멘트 타입의 장점을 돌아보게 했다. 광량조절기를 돌리면 ‘지직’ 하는 소리까지 내며 밝기가 변한다. 터치만 하면 스윽 밝기가 바뀌는 디지털 조광기보다 작동의 과정이 실감 나서 좋다.

고인이 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은 불빛의 성질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었다. 필라멘트가 달궈져서 나는 빛과 열의 온기까지 느껴져야 진짜 불빛이란 이유였다. 빛이 온몸으로 감각되기 위해선 열기가 곁들여져야 실감 난다. 그가 디자인한 온갖 공간의 일관된 따스함은 빛의 온기를 강조한 효과이기도 했다. 처박아 두었던 티지오를 다시 꺼내게 된 이유도 유난히 추웠던 올겨울, 죽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테이블 램프는 필요한 부분만 비추는 부분조명으로 혹은 그 자체로 공간 오브제가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3점 지지 테이블 램프는 영국의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조지 카바딘이 1931년에 만들었다. 서스펜션용 스프링을 다루던 그 역시 컴컴한 작업대의 불편함이 거슬렸다. 마음대로 움직여 필요한 부분을 비추는 램프가 절실했던 그는 관절구조를 떠올렸고 최소한의 필요 접점이 3점임을 확신한다. 여기에 전문분야인 스프링을 결합시켜 이전에 없던 램프 ‘앵글 포이즈’를 만들어낸다.

앵글 포이즈는 테이블 램프의 원형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온갖 메이커의 램프는 이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능만 남기고 모든 것을 없애버린 바겐펠트의 바우하우스 램프 정도가 예외다. 출발이 곧 완결로 마무리된 디자인의 완성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픽사의 영화 타이틀에 튀어나오는 조명등을 기억하시는지? 룩소 주니어(작은사진)란 인상적인 캐릭터의 출발이 바로 앵글 포이즈다. 철제 팔과 스프링의 결합, 거기에 기막힌 비례와 균형의 갓이 조합된 형태는 의인화시킬 만큼 매력적이다.

3점 지지 테이블 램프의 계보에서 가장 큰 이변은 티지오의 등장이다. 이탈리아어로 ‘낮은’이란 뜻의 티지오(Tizio)는 실제 높은 키의 램프가 낮게 줄어들도록 설계됐다. 형태의 혁명이란 생각이 들 만큼 획기적인 디자인이다. 이를 만든 재주꾼은 디자이너 리차드 사퍼다. 티지오는 스프링이 없지만 주저앉지 않고 형태가 유지되며 움직인다. 앵글 포이즈에 쓰였던 각형의 철제 팔도 기다랗고 납작한 철판으로 바꾸었다. 관절의 접점에 요란스런 볼트나 체결용 장식도, 전구 소켓을 연결하는 전선도 보이지 않는다. 저전압으로 구동되는 할로겐램프여서 철판 안에 감춰지는 납작한 선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티지오는 팔 길이를 늘려 무게 균형을 잡는 구조다. 마치 외줄 타는 사람의 균형봉이 길수록 안정적인 것처럼. 여느 3점 지지 테이블 램프보다 유난히 긴 팔을 지닌 이유다. 팔 끝에 매달아 놓은 두 개의 무게추가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지구 중력으로 스프링의 탄성을 대신하는 단순하면서도 교묘한 구조다.

스프링으로 관절이 움직이는 테이블 램프 ‘앵글 포이즈’를 의인화한 픽사의 ‘룩소 주니어’. [사진 픽사]

스프링으로 관절이 움직이는 테이블 램프 ‘앵글 포이즈’를 의인화한 픽사의 ‘룩소 주니어’. [사진 픽사]

티지오의 형태를 보면 알렉산더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 키네틱 아트가 떠오른다. 서로의 무게로 균형을 이뤄 움직이는 철판과 철사의 조합은 이전에 없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예술가들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의 빛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내게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3점 지지 테이블 램프를 꼽으라면 우선 티지오를 꼽겠다. 뉴욕 모마(MOMA)의 영구 소장품으로 티지오가 선정된 건 당연하다.

티지오는 실제 써보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지 못한다. 쓰는 사람이 형태를 만들어가는 예술품과 같다. 각도와 높이를 마음대로 조절해 자신만의 티지오가 태어난다. 티지오는 고정된 형태가 없으니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팔의 숫자는 여섯으로, 또는 셋으로 보인다. 일직선으로 세우면 하나로도 보인다.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은 바람이 만들 듯 티지오는 사용자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10년 전쯤 내 손에 들어온 티지오 테이블 램프는 여전히 현역이다. AI가 세상을 덮어도 보고 읽고 써야할 일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구들은 들여다봐도 작동원리와 과정을 알 도리가 없다. 사용자가 손을 댈 부분은 더더욱 없다. 쓰다가 싫증나고 고장 나면 아무런 감정 없이 새것으로 바꾸게 될 공산이 크다. 물건에 깃들게 될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할로겐램프의 불빛이 친구를 떠올리게 하고 ‘지직’거리는 잡음마저 정겨운 티지오를 나는 이십년 더 쓰겠다.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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